가족이라는 단어가 주는 신비로운 마법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가족은 삶의 시작과 끝이다. 생명이 시작되는 순간 함께 했듯, 호흡이 멈출 때도 가족의 품속에서 잠들기를 소망한다.
 나는 ‘연기하는 사람’, 바로 배우다.

내 인생에 있어서 연기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선물이자 지금의 내 가족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이다. 내 연기는 일상의 한가운데서부터 시작된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 마치 내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공연을 하고 있는 것처럼 박수를 보내주셨다. 여행을 좋아했던 우리 가족은 일요일이면 한탄강으로 소풍을 가서 그곳에 우리 네 식구가 들어갈 만한 조그마한 텐트를 쳤다. 가족들의 여섯 살배기 배우였던 나는 텐트 앞에서 공연을 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나는 그리 넉넉지 못한 우리 집을 보고 단 한 번도 가난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남에게 기죽는 것을 싫어하신 어머니는 나에게 늘 깔끔하고 세련된 옷을 입혀주셨다. 그 덕에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 했던 나는 그들 주변에 둘러싸여 노래부터 춤까지 장기 자랑을 하곤 했다. 가족들 앞에서 했던 레퍼토리를 줄줄 읊고 나서야 뒤돌아설 수 있었다. 이런 환경에 놓여있었기 때문인지 나의 꿈은 많이 편찮으셨던 어머니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의사를 꿈꿨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배우에 대한 꿈을 놓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진로를 정할 때, 나는 주저함 없이 어릴 적 사람들이 보내준 환호와 시선을 떠올리며 배우의 인생을 살기로 결심했다. 그 당시 노래와 춤, 연기를 모두 다 보여줄 수 있는 장르가 무엇일까 고민하던 중 뮤지컬을 알게 되었다. 처음 접했던 뮤지컬은 충격 그 자체였고, 운명처럼 나는 그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배우는 배고픈 직업이라며 내 결정에 반대했다. 그리고 나는, 부모님의 우려와 같이 바닥을 치며 전전긍긍하던 시간을 보냈다. 죽고 싶은 심정이 들 정도로 인생 최악의 시기를 보냈던 그때, 부모님은 오히려 나를 격려해주셨다. 하지만 그 모습이 나를 더 괴롭게 했다.
 그때, 나는 새로운 가족을 만났다.

연예인, 영화배우, 지적인 연기파 배우 등의 수식어를 달고 다녔던 그녀는 솔직히 처음에는 비호감이였다.

 완벽한 모습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한 무대에서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주인공을 하며 우리들의 자리까지 빼앗고 있는 적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 모든 편견 속에서 놓친 게 하나 있었다. 그녀가 대배우의 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단 일 초도 무대를 경시하지 않았다. 평생 최고의 배우가 펼치는 무대를 봐왔기에 무대에 대한 외경심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매일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기 위해 나보다 더 아침 일찍 나와서 밤늦게까지 연습하곤 했다.
 그 순간, 나는 사랑에 빠졌다. 무엇보다 처음으로 내 연기를 알아봐준 사람을 만나서 기뻤다. 심연에 묻혀있던 잠재력을 발견하여 현재의 나로 끌어올려준 사람은 바로 내 아내이다. 그녀는 무대 위의 자존감을 키울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내 연기의 부족한 부분을 그 누구보다 신랄하게 비판해 주었다.

언젠가 나는

 

 “왜 그때 나를 만났어?

 너는 잘났고, 난 가진 것도, 능력도 없는데…”

 

라고 묻자 아내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서 만났어.

 아무 것도 없어 보이지만 정작 자기 재능도 모르는 것 같아서.

그게 안타까웠어.

 그러니까 바보온달과 같은 거지.

그건 내가 만들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그리고 덧붙였다.

 

 대신 당신은 당신의 재능인 사랑을 많이 주라고.

자신은 그게 많이 부족하다고.

그런 사랑과 믿음으로 우리는 연애 6년 만에 결혼을 했다.
내 부족함을 현명하게 채워주는 가족.

슬픔과 행복을 함께 나누는 가족이라는 말보다 위대한 말이 있을까.

그 행복의 울타리 속에서 지명이가 태어났다.

배냇짓부터 옹알이까지 가족 중 가장 위대한 연기를 하는 아이. 매일 한 편의 기적 같은 드라마를 각색하여 감동을 주는 배우. 어떤 의도나 꾸밈이 없는, 배우의 궁극적인 목표인 무아지경의 일체. 우리 가족은 또 다른 완전체로 진화한 것이다. 가족이 아니었다면 배우가 되지 못했을 것이고, 또 다른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그저 연기자로 전락했을 것이다. 완전체로서의 가족이 있었기에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다.

배우라는 타이틀 앞에 ‘추상미의 좋은 남편’, ‘이지명의 좋은 아빠’, ‘부모님의 좋은 아들’이 되길 소망한다.

 그 길을 따라서 오늘도 나는 무대 위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