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제대하고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발령받아 소위 초짜 교수 생활을 시작했을 때다. 당시 연세대학교 주변을 둘러싼 산에는 영세민들이 사는 판자촌이 있었다. 그곳에 ‘연세의대 부설 연희지역 보건관리소’가 세워졌다. 판자촌 주민 5만여 명을 돕기 위한 세브란스 병원의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내가 임명됐는데 초짜 교수의 열심이 통했는지 프로젝트는 꽤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판자촌에서 일하다 보니 한 과목만 하는 의사는 별로 쓸모가 없고 소위 ‘만능’ 의사가 필요하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이때 우리나라가 신청한 세계은행의 교육차관을 심사하는 몇몇 전문가가 판자촌 프로젝트를 보기 위해 방문했는데, 나는 이들을 판자촌으로 인솔해 가난한 그곳의 실상을 직접 눈으로 접하게 하였다. 그런 뒤 함께 사무실에 돌아와 영세민과 의과대학 교육 등에 대해 토의하다가 나도 모르게 “전과(全科)를 다 진료하는 의사가 절실한데 한국엔 그런 교육이 없다.”고 한탄하였다. 그때 한 분이 “닥터 윤, 그런 교육 과정이 있습니다. 가정의학(Family Practice)이 바로 당신이 원하는 겁니다.”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가 바로 나를 미국으로 불러 가정의학 전문의가 되게 한 미국 미네소타대학 가정의학과 엘든 버글런드 교수다. 큰 키에 은빛 머리를 한 전형적인 스웨덴 이민자 후손으로, 나중에 알았는데 1959년에 서울대학병원 소아과 자문교수로 1년간 한국에 머물기도 했던 분이다. 다행히도 나는 미국 의사자격시험에 합격해서, 미국 미네소타 의과대학에 지원하여 버글런드 교수 밑에서 전공의를 하게 되었다.

내가 전문의 과정을 시작한 1974년만 해도 미국과 한국의 의료 수준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미국은 거의 모든 물품이 일회용에 최첨단 의료 설비를 갖추었지만 한국은 철제 주삿바늘을 숫돌에 갈아 썼고 유리 주사기를 냄비나 벤또(도시락)에 넣어 끓여 쓰던 때였다. 내 전공의 생활도 순탄치 않아서, 미국 최고의 수련 병원 동료 의사들과의 경쟁에서 항상 처지곤 하였다.
하루는 소아과 과정 수련 중에 버글런드 교수가 급히 찾았다. 나를 보더니 대뜸 반일 감정은 없애고 소아과 파견 수련을 잘 받으라면서 “사실은 자네 팀장인 닥터 시게코가 자네와는 같이 못 하겠다고 했다.”며 내가 실력은 없고 고집만 세서 특히 여자팀장인 자신한테 비협조적이니 그만두게 해 달라는 건의를 했단다. 버글런드 교수가 나를 두둔해주어 간신히 도중하차는 면하게 됐는데, 얼마 후 다시 호출해 찾아갔더니 나에 대한 수련 평가가 최하위라서 전공의 과정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으니 또다시 중도하차시키라는 얘기가 나왔다고 했다. 버글런드 교수가 학교와 끈질기게 상의한 끝에 “닥터 윤은 성공적으로 가정의학 전문의 과정(3-4년)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 가정의학과를 만들 사람”이라고 설득해 급한 불은 껐다는 것이다. 엄청난 열등감과 좌절감을 느낀 순간이었다.
며칠 후 버글런드 교수와 면담하면서 이 병원을 떠나 시카고나 뉴욕 같은 큰 도시에서 전문의 과정을 할 생각이라고 했더니 버글런드 교수는 “닥터 윤, 미국 의과대학생이 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나는 닥터 윤이 행운아라고 생각해.”라면서 내게 지금 상황을 좀더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라고 했다. 씩씩거리며 집에 돌아와 일기를 쓰려는데 마침 그날의 명구가 역경수순(逆境手順)이었다. 어려움을 편하게 쉽게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닌가? 고심 끝에 미네소타 의과대학의 학생이 되기로 마음을 고쳐먹고 버글런드 교수를 찾아가 뜻을 전했다. 그는 이번 결정이 나의 의사 인생, 교수 생활에서 아주 긍정적으로 작용할 거라며 반겼다. 이렇게 하여 한국의 의과대학 교수가 미국 의과대학생이 된 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미국 유학에서의 이런 경험은 의사로서, 그리고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아주 귀하고 값진 것이었다. 나는 1978년 10월에 귀국해 여러 역경을 이겨내고 1985년 마침내 가정의학을 23번째 전문과목으로 만들었다. 나의 도전과 노력도 눈물겨웠지만 버글런드 교수가 없었다면 ‘가정의학’이라는 전문과목은 한국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990년 버글런드 교수가 심장 수술을 받고 입원해 있던 병실을 방문하였다. 병상에서 그는 “자네를 통해서 한국에 가정의학이라는 전문과목을 만들게 된 게 내 인생 최고의 보람 중 하나”라며 서툰 한국말로 “감사합니다. 수고했어요.”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병실을 나오며 그와의 첫 만남부터 4년간의 전공의 생활, 잊고 있던 추억들이 생각나 주체할 수 없는 감사의 눈물을 쏟았다.
버글런드 교수가 74세로 운명한 지 30년이 다 돼 간다. 미국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의 그로스라는 곳에 묻혀 있다. 그에게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닥터 윤은 한국 가정의학의 아버지, 나는 할아버지일세.” 그가 농담처럼 늘 하던 이 말을 비석에 새겨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