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박수근은 1914년부터 1965년까지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전염병, 보릿고개 등 그야말로 인고의 시대를 사셨던 분이다. 그 정치적 격동기는 한 남자의 평범한 일생이 그대로 한국사가 되었던 시대이다.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가 없는, 마치 소낙비가 쏟아지고, 우박이 떨어지고, 변덕스러운 봄이 찾아오고, 그러다가 여름이 우거지고 겨울이 불투명하게 얼어붙는 것처럼 거친 세파가 한꺼번에 밀려들고 그것들을 목전에서 그대로 겪어내야 하는 삶의 엄숙성이 있었다.
아버지는 한국 격동기의 물결에 저항할 수 없는 한 마리 물고기처럼 그 물결의 거센 움직임과 더불어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이리저리 먹을 것을 찾아 회유할 수밖에 없는, 그러면서도 밀레와 같은 화가를 가슴 속에 따듯하게 품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꿈은 단순하지 않으면 이루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복잡한 현실을 복잡하게 생각하면 꿈을 잃어버리고 만다. 현실을 버티는 것은 단순해야 가능하다. 이상적인 꿈을 외부 현실로부터 훼손당하지 않고 처음에 품은 생각 그대로 온전히 간직하려면 복잡한 현실에 순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대에 대한 부정과 원망과 저항과 한숨을 깨끗이 제외한 단순한 밥그릇과 같은 순정함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성이기도 하고, 바보스러움이기도 하며, 무구함이기도 하고, 정직성이기도 하다. 아무리 많은 단어로 바꾸어 불러보아도 여전히 그 현상의 언저리를 돌고 있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어떠한 언어적 수사로도 살아야 하는 시간들을 정확히 표현하기는 어렵다. 때로 언어는 유한한 의미로서 순수한 느낌을 가두기 때문이다.

1925년의 아버지는 밀레의 만종을 보며 고개를 숙였지만 2016년의 나는 아버지의 단순성에 고개를 숙인다. 평자들은 박수근 그림의 단순성을 한국적, 향토적, 서민적이라고 명쾌하게 해석하지만, 나는 그것을 ‘나이브한 순수성’으로 부른다. 비극을 비극으로 인식하지 않고 슬픔을 슬픔으로 인식하지 않는 그는 그냥 거울 같은 사내였다. 광포한 현실에 대한 저항이나 비판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관심도 아니며 때를 기다리며 견디는 것도 아닌 그냥 사는 것. 그것은 처세이기도 하고 순응이기도 하고 묵묵히 지키는 것이기도 하다. 파괴되고 훼손되고 떠밀려가는 시대에서 무엇을 일구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현실에 쓸려가지 않고 묵묵히 지켜내는 것이 곧 일구어내는 것이다.
나는 초로의 나이에 서서 그 인간적인 어려움에 대해 다만 고개를 숙일 뿐이다. 묵묵히 순응하면서 잃지 않는 희망, 시대의 엄연함과 삶의 엄숙성, 순응은 타협도 비굴함도 아니고 다만 박토에 씨앗을 뿌리는 선함일 뿐이며 그것은 빨래터의 화강암처럼, 마을의 나무처럼 굳건하고 단단하고 의연하다. 그러기에 박수근의 나목은 추워도 잃지 않는 희망나무 십자가 같은 모습이다.
봄은 자신이 만들어놓은 전 존재를 여름에 넘겨주고 여름은 또 가을에게 자신을 통째로 넘기듯이 박수근 그림의 선함은 타인에게 선함을 강조하지 않고 다만 그 자신의 선함을 그 자리에 남겨놓을 뿐이다. 그것을 표현하는 어떠한 기교도 차라리 거추장스러운 것이니 나목에는 무수한 이파리들이 필요 없다. 나목은 하늘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시대, 박수근 그림은 한국미의 전형으로 평가되어 있다. 박수근 그림에서 어두운 색깔의 주조색은 토색이고 밝은 색깔의 주조색은 흰색인데 토색은 화강암의 단단한 질감을 드러내는 한국적 마티에르이고 흰색은 다른 색들을 수용하나 자신을 잃지 않는 중용의 색깔이다. 동양화의 흰색은 비움의 미학을 드러내는 여백이 되고 서양화의 흰색은 다른 색들을 수용하면서 상생할 줄 아는 포용성을 드러낸다. 다른 색들의 명도를 높여서 밝고 부드럽게 만들어 주면서도 자신의 나이브한 순수성을 유지하는 색깔. 박수근 그림의 물성은 바로 그런 것이다.
국가의 경계마저 무의미해지는 다원화 시대에서 아마도 박수근 그림은 모든 이질적인 것들과 상생하지만, 그 자신의 물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한국적 정신의 표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