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나라의 옛것들로부터 작품의 영감을 받는다. 1987년, 아버지를 따라 독일에 가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그때는 88올림픽 직전이라 한국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외국인들로부터 한국에 대한 많은 질문을 받으면서 우리 가족은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을 더 크게 갖게 되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삼국시대 토기를 수집하신 부모님은 토기를 사 모으기 위해 다닌 고가구점 골동품점에서 소반, 반닫이 등의 고가구도 함께 사 오시곤 했다. 나는 자연스레 옛것들을 보고 자란 환경 덕분에 우리의 옛 물건들에 친근함과 편안함을 느꼈다.
초기 작품들은 의도치 않았지만 무의식중에 그런 형태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백제 토기의 정갈한 비례와 소박함을 추구하며 무늬보다는 선이 강조된 형태를 추구했고, 함께 전시된 공간의 여백을 중요시했다. 그래서 화이트가 주류를 이뤘는데, 그나마 색이 들어가더라도 화이트칼라 옆에 있을 때나 구분될 정도로 은은하게 연한 색상으로 작업했다. 나는 삼국시대의 토기, 조선시대의 청화백자나 분청자의 오랜 세월과 함께 생겨난, 그리고 만졌을 때 느껴지거나 자세히 보았을 때 보이는 그 묘한 텍스쳐를 작품에 구현하고자 했다. 나는 내 화기 작품들이 기하학적인 형태를 띠어 매우 모던해 보이지만, 전통가구인 소반과 함께 디스플레이하면 조화롭게 어울리며 화기의 높낮이를 달리하여 군집으로 배열했을 때 산수화 같은 농담의 풍경이 연상되기를 의도했다.
옛것이 지닌 세월의 오묘한 흔적과 삶의 여정이 담긴 유물적인 미감, 절제되어 더욱 배가된 아름다움은 시간이 갈수록 나를 매료시켰고, 작품세계와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나는 부모님의 수집을 이어받아 ‘소반컬렉터’라는 또 하나의 타이틀을 갖게 된다. 그러다 보니 옛 물건들뿐만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역사와 정신에도 관심이 생겼다. 물건 하나에도 혼을 담아 만든 장인정신은 우리의 옛것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치 있고, 다른 나라의 전통문화보다 더 특별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미감은 유구한 역사와 함께 흘러온 어떤 우월한 유전자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러한 전통문화유산에 관한 다양한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가장 집약적인 상징과 정신의 집합체는 ‘민화’라고 생각하게 됐다. 민화에 표현된 다양한 상징과 이념은 가구와 건축 등 곳곳에 녹아있다. 그리고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즐긴 민화는 가장 대중적이고 한국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처음 민화에 대한 책을 읽었을 때는 단순히 그림과 문자에 담긴 뜻을 알고자 했다. 하지만 책을 점점 읽어갈수록 민화를 그리고 즐긴 조상들의 마음가짐에 주목하게 되었다.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때로는 해학적인 표현을 하면서 현실의 삶을 담는 것이다. 역사의 침울한 시기에도 밝고 명랑한 그림으로 정서적인 균형을 이뤘고, 현실의 우울함을 극복하기 위해 삶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준 것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민화는 타인에게 행복, 출세, 장수 등 살아가면서 필요한 복을 빌어주는 마음과 더불어 유교적 덕목을 지키며 사람의 도리를 다하고자 하는 마음이 합해졌다. 이는 삶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과 애착을 갖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도록 힘을 준 도구였던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날의 우리는 다소 비관적이고 소극적으로 사는 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서민에서부터 궁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이 곁에 두며 누린 민화와 같은 예술이 오늘날 우리 일상에는 너무 부족한 건 아닐까 싶었다. 많은 예술가가 일상 예술을 실천할 수 있도록 생활에서 즐길만한 작품을 만들고 있지만, 아직 많은 이들이 일상에서 여유를 즐기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나 역시 그런 의미에서 더 많은 이들이 좋은 뜻을 지닌 작품을 즐기며 삶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받을 수 있도록 생활자기 작업을 꾸준히 이어가려고 한다. 
2017년에 열린 개인전 <만물만개전>에서는 민화로부터 타인에게 복을 빌어주는 아름다운 마음을 본받아 인생의 꽃이 만개하는 절정의 순간을 맞이하고 간직하길 바라며 평면 작품을 전시했다. 부귀영화, 불로장생, 수복강녕의 상징을 지닌 도상들은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이다. 하지만 내 작품의 메시지는 개인의 이기적인 욕망이 아니라 타인에게 적극적인 삶의 동기를 주는, 너그럽게 베풀 수 있는 마음의 여유였으면 한다. 또한 내 작품이 단순히 상징성을 가진 도상이나 전통기법을 재현한 주술적인 의미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모든 예술가가 그렇듯 작품을 통해 내 마음을 전달함으로써 누군가의 삶이 조금이나마 더 의미 있고 밝아지길 바란다. 옛것으로부터 받은 영감은 결국 삶을 이어갈 긍정적인 에너지로 표출되어 후세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