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베이스를 손에 잡았던 날, 앞으로 내가 베이시스트가 되어 뮤지션으로 살아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처음 베이스를 연주하게 된 것은 교회 찬양팀에서였다. 당시 밴드에 드럼과 베이스 연주자가 공석이었는데, 그 중 나는 드럼을 연주하고 싶었다. 그러나 드럼 연주자가 될 기회는 결국 친구에게 돌아갔고, 나는 자연스럽게 베이스를 연주하게 되었다. 그때의 상황을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렇다. 친구와 나는 둘 다 드럼을 연주하고 싶었는데, 그 친구에게는 누나가 셋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찬양팀이었는데, 동생이 원하는 대로 드럼을 연주하게끔 해줬다. 대신 나는 일렉베이스를 연주하게 됐고, 그것은 내 인생의 첫 번째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가끔은 한 번씩 생각한다. 그때 내가 드럼 연주를 했다면 지금쯤 드러머로 잘 살고 있었을까, 하고. 그런데 어쩌다 맡게 된 베이스 연주는 너무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점점 더 잘하고 싶었고, 더 깊게 알고 싶어졌다. 그러다 보니 악기를 끌어안고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하지만 혼자서 공부하고 연주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배움에 대한 갈증이 더 많이 생기면서 제대로 베이시를 배워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때 처음으로 만난 선생님이 장응규 선생님이다. 선생님께서는 내게 콘트라베이스를 권하시며 존 패티투치(John Patitucci)와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의 앨범을 선물해 주셨다. 그때 처음 귀 기울여 들었던 콘트라베이스의 소리는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넘쳤다. 선생님의 권유로 서울재즈아카데미에서 공부하던 중 버클리 오디션을 봤고,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준비기간도 짧았는데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다니 ‘나는 천재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버클리 입학 후 어느 날, 외국 친구들이 합주를 제안했다. 그 제안을 받아들인 나는 든든한 리얼북(널리 연주되는 스탠더드 곡들을 담은 교과서 같은 책)과 함께 합주를 시작했다. 그런데 합주가 시작되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들의 흐름에 따라가려고 하니 악보를 펼칠 시간도 없었던 것이다. “A라는 곡을 연주할까?”라고 물으면, “그래”라는 대답이 나옴과 동시에 카운트를 하는 것이 아닌가. 악보를 보면서 연주해온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그 모습을 지켜본 한 일본인 학생은 “도대체 너 어떻게 여기에 온 거냐?”라고 물었다. 순간 창피함과 동시에 악과 오기가 생겨났다.

이후 ‘너희들 다 두고 봐라’하는 마음으로 매일 최소 10시간씩 연습에 매진했다. 손가락에서 피가 나고 물집이 터져 굳은살이 생겼고 또 피가 났다. 한마디로 손가락이 너덜너덜해질 만큼 연습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후, 나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굉장히 호의적이었고, 나와 함께 진심으로 음악을 하고 싶어 했다. 연습은 내 모든 시간을 투자해서 내 것으로 만든 ‘오롯한 나의 것’을 주었다. 그로인해 당당해졌고, 자신감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내게 찾아온 기회도 놓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연습만이 내게 줄 수 있는 선물이었다.

그렇게 버클리를 졸업하고 몽크 인스티튜트(Thelonious Monk Institute of Jazz)에 입학했다. 그곳은 2년에 한 번, 악기별로 단 한 명만이 정원인 비영리 교육기관이다. 2년에 한 번씩 학교를 옮겨가며 수업을 하는데, 내가 다니던 때에는 뉴올리언즈에 학교가 있었다. ‘재즈의 본토 뉴올리언즈에서 재즈 거장들로부터 배우고 함께 연주를 하다니!’ 당시의 흥분과 기쁨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내 머리와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그대로 있다. 그때의 값진 경험은 그만큼 내 음악과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줬다.

그 시절 나는 대가들로부터 남들이 하지 않은 새로운 뭔가를 찾아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점을 배웠다. 오랜만에 애플 창시자인 스티브 잡스의 강연을 다시 보았다. 거기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think different”이다. 성공한 사람들을 성공으로 이끈 것은 결국 새로운 생각과 남들이 하지 않은 것을 시도하는 도전정신이 아니었을까? 내 음악에 대한 계획도 마찬가지이다. 남들과 다르게 보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 싶다. 그리고 마음에 스며드는 감동을 전하는 음악을 하고 싶다.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 평소 내가 좋아하는 피천득 수필가의 글귀이다. 오늘의 나는 나의 노력과 더불어 함께한 모든 이들의 영향으로 만들어졌다고 믿는다. 이제껏 만나온 인연과 앞으로 함께할 많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래서 멋진 음악만큼 중요하다. 앞으로의 삶도 내 인연들과 함께 음악을 즐기며 멋지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