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하얀 도화지와 색연필만 있으면 온종일 즐겁게 그림을 그렸던 기억이 난다. 푸른 하늘과 동산, 그리고 그 동산에 피어있는 꽃과 나비 그림으로 가득했던 나의 하얀 도화지. 내 도화지가 하늘, 꽃, 그리고 나비로 가득했었던 건 대부분 시간을 집 앞 공원에서 보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누구보다도 자연을 사랑했던 어린 시절의 내가 지금 플로리스트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내가 처음 꽃을 배우기 시작한 건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었다. 무언가를 그리거나 만드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개학하기 전 취미 생활로 무언가를 배워보리라 다짐하고 그 길로 꽃꽂이 학원에 등록했다.
두근거렸던 첫 수업에서 처음 만난 꽃은 스무 송이의 붉은 장미. 그렇게 처음 꽃으로 만든 어수룩한 꽃다발을 곱게 포장해서 집으로 오는 길, 꽃과의 첫 만남에 설레어 하던 내 모습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 이후로 그렇게 나는 꾸준히 꽃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쌓았고, 꽃이 주는 행복감과 향기에 취해 나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더 깊이 꽃과 사랑에 빠진 것 같다.

이제 나는 햇볕이 잘 드는 작은 한옥 플라워 아뜰리에 이에나의 대표 플로리스트로 일하고 있다. 도심 속 숨겨진 비밀의 정원과 같은 곳, 이에나. 서울에서 가장 한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북촌에 위치한 이곳에서 나는 7년째 정원을 가꾸고, 또 천천히 꽃을 피우는 하루를 보내며 자연을 닮은 꽃을 만들고 있다.
어스름한 새벽, 시장에서 찬찬히 고른 꽃들을 다듬고 정원을 보듬으며 시작하는 이에나의 아침. 분주한 아침이 지나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가지런히 유리병에 진열된 촉촉하고 싱그러운 꽃들이 자아내는 향기가 오롯이 이 공간을 채운다. 물론 컨디셔닝 작업으로 시작된 아침이 끝없는 작업과 청소로 마무리되는 고된 하루도 있지만, 어느 여유로운 오후에는 한옥 툇마루에 앉아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크고 작게 피어나는 정원의 꽃을 마주하기도 하고, 또 창문 사이로 비치는 아틀리에 안의 꽃들을 감상하며 더없이 행복한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다채로운 표정의 꽃들. 그것들을 보고 있으면 같은 꽃이라도 매일 새롭고 또 특별하다. 고개 숙여 인사하는 꽃, 활짝 피어 방긋 환하게 웃는 꽃, 그리고 도도하게 꼿꼿이 서 있는 꽃. 같은 종류의 꽃이라도 동일한 색감과 형태를 지닌 꽃이 없고 시간이 흐르면 꽃잎이 서서히 벌어지며 시시각각 숨겨진 모습을 보여주는 사랑스러운 꽃들.
사실 매일 보는 꽃이지만 같은 꽃에도 이렇게 다양한 표정이 존재하니 나에게 꽃은 늘 새롭기만 하다. 같은 작품을 만들어도 꽃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형태나 색감이 완벽히 같을 수는 없어서 더욱 매력적일 수밖에 없는 작업. 아마도 플로리스트들은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색과 질감의 물감을 가지고 있는 화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향기롭고 아름다운 형태를 가진 꽃은 어떻게 만들어도 예쁠 수밖에 없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가장 완벽하고 아름답다고 느끼기 때문에 나는 꽃을 만들 때 특별한 기교를 부리거나 인위적인 소재를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높고 낮은 꽃들 사이에 바람이 살랑일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또 그곳에 나비가 쉴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히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작품이 완성된다. 물론 이처럼 꽃을 만드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의 규칙과 방법이 존재하지만 사실 꽃을 만드는 데 있어 완벽한 조형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꽃에 담긴 마음과 정성스럽게 꽃을 만드는 과정 그 자체라고 믿는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이에나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처음 꽃을 배웠을 때의 설렘과 기대감으로 가득하다. 다정하고 따뜻한 메시지를 담고 떠날 오늘의 꽃들. 그 꽃들을 만들며 오늘도 나는 꽃과 나비를 그리던 어린 시절 나의 모습 그대로, 자연 그대로의 꽃을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