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움직인다, 사유와 경험이 흐르는 방향으로. 그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내며 ‘현재’가 된다. 이때 음악은 시간을 재현하는 공간이 되고, 우리들의 체험공간은 장소성을 지닌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다.
이 소리길 위에는 세계적인 천재 피아니스트 박종화(44, 서울대 교수)*의 인문학적 상상력과 철학이 깃든 음악 여정이 펼쳐지고 있다. 그는 2년간 제작한 전용 트레일러에 500kg이 넘는 육중한 그랜드 피아노를 싣고 제주도에서부터 연천의 최전방까지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길 위의 콘서트’(뮤직 인 모션(Music in Motion): ‘달려라 피아노’ 프로젝트의 일환)를 열었다.
일상의 공간,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음악으로 소통하고 있는 그를 서울 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나보았다.

 

# 길 위의 피아노, 길 위의 철학가

 

그가 처음 피아노와 만난 것은 4세 때였다.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덕에 어릴 때부터 피아노와 친숙했던 그는 우연히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멜로디를 따라치면서 음악적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5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음대에서 영재과정을 밟았고, 美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는 4년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해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러셀 셔먼(Russell Sherman, 1930~)을 사사했다. 이후 드미트리 바쉬키로프(Dmitri Bashkirov, 1931~) 교수를 따라 스페인 마드리드의 소피아 왕립음악원으로 간 그는 소수 정예의 예술가에게만 수여한다는 디플롬을 획득했다. 그리고 다시 2003년에는 독일 뮌헨 음대에서 최고 연주자 과정을 마치면서 학업의 지도를 완성해 나갔다. 일본, 미국,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연주자로서도 화려한 삶을 살아오다가 2007년 서른셋의 젊은 나이에 서울대 교수로 부임하여 교육자로서 제2의 인생을 열게 된다.
“클래식 음악을 공부해서 외국에서 좀 더 쉽고 빨리 사회 구성원으로 진입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언어도 완벽하게 소화하려고 노력했죠. 사실 지금은 한국어가 많이 늘었지만, 그때는 사용할 환경도, 기회도 별로 없었어요. 2007년에 귀국해서도 몇 년간은 한국에 거의 없다시피 했어요. 방학이면 외국으로 연주를 떠났으니 2011년경부터 제대로 정착했다고 볼 수 있죠. 표면적으로는 한국 사회에 융화되고 적응해갔지만, 결혼하고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제 ‘뿌리’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이러한 ‘뿌리 찾기’의 맥락에서 그는 2015년, 한국의 전래동요와 창작동요를 피아노곡으로 재해석한 음반 <누나야: NUNAYA>를 발매했고(9월에 LP 출시 예정), 전국 리사이틀도 개최했다. 우리 역사와 20세기의 정신세계를 반영하는 매체로서의 동요는 자신의 모태, 뿌리를 찾아줄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선택한 것이든, 선택된 것이든 하나의 물리적인 공간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자유롭게 유영해온 그에게 있어서 정서적 고향은 어디일까.
“정서적 고향은 제가 공부했던 곡들이에요. 어린 시절에는 연습 때문에 친구들과 많이 놀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 시간, 그 시대의 기억들이 모두 담긴 곡들이 제 고향이 됐죠. 그것들이 있어서 지금의 화려한 곡들을 연주할 수 있었어요. 음악은 모든 것의 시작이자 가능성이에요. 그래서 음악을 통해 사고하고 철학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얘기죠. 작곡가들의 음악에는 그 시대의 문화와 예술, 동·서양의 모든 것들이 뒤섞여 있으니까요.”
트레일러에 피아노를 싣고 길 위의 콘서트를 여는 것은 오래전부터 품어온 그의 간절한 꿈이었다. 그러던 중 홍대 앞에 수십 대의 피아노를 설치해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거리 콘서트를 기획했던 정석준 대표를 만나게 되면서 꿈의 씨실과 날실은 촘촘히 엮이기 시작했다. 각국의 언어와 음악언어까지 다양한 언어를 구사해온 그가 연주자를 넘어 문화를 ‘창조’하고 ‘기획’하는 경계인으로서 빼곡하게 기록한 삶의 외피와 내피들은 열린 텍스트, 확장된 이야기로 새롭게 구성되고 있었다.
“저는 바흐(Johann Sebastian Bach)를 좋아하는데, 그는 음악에 관한 모든 일을 한 진정한 음악가, 예술가였어요.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음악이 특수화(specialization) 되고 연주자의 위치가 올라갔지만, 지휘자들이 카펠마이스터(Kapellmeister, 음악감독)의 지위를 갖게 되면서 연주자는 계속 악기만 다루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 물론 충분한 기간 동안 ‘선택과 집중’이 일어난 점은 음악의 발전에서 중요한 부분이죠. 저는 바흐 시대처럼 예술가로서 활발히 움직이고 싶어요. 현재 연주와 교육을 하고, 작곡가들과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 사회와 소통하는 완전한(complete) 활동을 하고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어요(웃음).”
그는 실제로 일상의 한복판으로 무대를 옮겨와 삶의 실재와 마주했다. 공장에 울려 퍼진 아르보 패르트의 <거울 속의 거울, Spiegel im Spiegel>은 노동자들의 땀 흘리는 소리, 그리고 그들의 들숨과 날숨이 드릴과 해머, 엔진 소리와 부딪치고 공명하면서 새로운 음악으로 재탄생된다. 생애 첫 피아노 연주를 경험한 제주도 해녀들의 노동요는 리스트의 <물의 희롱> 선율에 휘감기며 생(生)을 위로한다. 휴전선 철책의 군인들에게는 쇼팽의 <녹턴>이 청춘의 뜨거운 문장으로 알알이 박힌다. 피아노라는 악기가 생물이 되는 순간들이다.  
“해녀들의 숨소리와 노래, 파도와 바람 소리가 피아노와 하나 되어 환상적인 합주가 됐어요. 침묵 속에서 음악을 정교하게 만들어온 예술가에게는 난해한 작업이지만, 연주자로서 다른 차원으로 성장할 수 있었죠. 명상할 때 어떤 경지에 이르면 귀가 열리고 숨겨진 소리를 듣게 되잖아요. 음악은 결국 본능을 자극하고 마음을 움직이게 하죠.”
피아노라는 정적인 물건을 동적으로 만드는 행위는 그의 말대로 시대정신(Zeitgeist)이 반영된 역동적인 변화이다. 그는 앞으로 클래식계의 진화를 촉구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궁극적으로는 클래식 음악의 깊이와 가치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차기 세대들에게 아이디어를 실천할 수 있는 용기와 새로운 콘텐츠를 심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늘 생각해온 것은 클래식 음악과의 연관성(relevance)이에요. 제가 몇십 년간 갈고닦은 스킬이 얼마나 적절하게(relevant)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을지, 그리고 콘서트를 준비하면서도 한국에 대해서 배우고 해석하는 저의 모든 작업 방식들이 사회와 어떻게 관련되는지, 또 얼마나 사회와 ‘함께’ 움직일 수 있을지 고민하죠. 앞으로 클래식계에는 더 많은 변화가 필요해요. 사실 유럽, 미국 등 본고장에서는 베이비부머들이 클래식 음악의 소비자로 유입되지 못했어요.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새로운 세대들이 유입돼야 해요.”
탈 공간화 된 피아노와 교감하면서 달려온 그의 길이 곧 음악의 길이고, 음악의 길이 곧 그의 길이다. 앞으로 그는 소리길 위에 얼마나 다양한 언어의 집을 짓게 될까. 다시, 침묵을 깨고 들려올 소리들을 기다려본다. 생각의 씨앗에서 발아된 그의 음악적 실천들을.

 

글. 사진/ 김신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