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이 좋았던 건지 지금껏 일한 회사가 한 곳을 빼곤 모두 부분으로든 전체로든 원격근무를 시행하는 곳이었다. 똑같이 일하는데 회사로 출퇴근할 필요가 없는 거다. 정말 그게 가능하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으나 이미 북미와 유럽 등지를 중심으로 시행되고 있는 업무 방식이다. 미국 전일 노동자의 3분의 1가량이 업무의 상당 부분을 회사가 아닌 곳에서 원격으로 처리한다는 통계가 있고, 델(Dell)이나 아마존(Amazon) 같은, 다들 한 번쯤 들어본 글로벌 대기업 역시 원격근무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추세다.
갈수록 가벼워지는 랩톱 및 고속 인터넷의 보급과 캐비닛 안에 차곡차곡 쌓여있던 자료들이 온라인 저장 공간 클라우드로 옮겨 가면서 생긴 현상이다. 원격근무 덕분에 내가 지난 10년간 살아본 곳은, 도시 수로는 30개에서 40개 사이 어디쯤. 원격근무라는 키워드로 얼마 전 장편 다큐멘터리 <원 웨이 티켓>의 제작과 국내에 책 <원하는 곳에서 일하고 살아갈 자유, 디지털 노마드>의 출간을 마무리하기도 했다. 이렇게 다양한 곳에서 지내면서 그리고 다큐멘터리와 책으로 이야기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얻은 소중한 배움들이 있다.

다큐멘터리 제작에 어떤 식으로든 연관된 크루들의 국적은 대략 열 개 정도이다. 그리고 전 세계 각지에서 원격으로 일하며 사는 70여 명의 인터뷰이들을 25여 개 도시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국경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봐줄 수 있기를 바라며 제작에 박차를 가했는데, 여기에는 영국 런던 출신 시나리오 작가의 도움이 컸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졸업까지 20년 가까이를 한곳에서 보낸 내게 필연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는 다양성에 대한 고찰과, 이를 토대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부분에 대해 많은 도움을 줬다.
단적인 예로는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비나 인종 구성이 필요 이상으로 한쪽으로 치우치진 않았는지, 인물들을 다루는 방식이 그러한 선천적인 조건들에 영향을 받지는 않았는지와 같은 것들이었다. 세심함이 요구되는 작업이었고, 끊임없는 고민과 물음이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뷰이 섭외 단계부터 좀 더 힘썼더라면 더 다양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한국에서 콘텐츠를 만드는 이들에게 이 지점은 갈수록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고민이자 과업일 것이다. 다양성에 관해 직접 체험하고 부대낄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환경에서,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지 자신이 만든 콘텐츠는 국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전 세계 구석구석을 넘나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책을 집필하고 편집자의 도움을 받아 탈고를 거치는 과정에서도 새삼 깨닫고 배운 것이 있다. 책에는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몇몇 인터뷰이들의 이야기를 인용하는 부분이 있다. 영어로 진행된 인터뷰에서 필요한 부분을 한국어로 옮겨 책에 인용구로 넣는 작업 중에 나도 모르게 여성 인터뷰이의 이야기는 ‘~요’로, 남성 인터뷰이는 ‘~다’로 문장을 마무리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여성 인터뷰이가 ‘~라고 느꼈어요’ 라면 남성 인터뷰이는 ‘~라고 느꼈습니다’ 이런 식이다. 이것을 불현듯 발견하고 하나하나 다시 바꾸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안에 자리한 여러 편견을 돌아볼 수 있었다.
국내에서도 문제가 많은 각종 영화 자막들, 분명 극 중에서 둘은 동등한 동료로 등장하는데 여성은 남성에게 존댓말을, 반대는 반말로 번역하는 일부 한국어 자막과 관련된 해프닝 같은 것도 동일한 맥락일 것이다. 동시에 출산율은 출생률로, 성매매는 성매수로 모든 단어를 일괄 정리했다. 여전히 분명 어떤 식으로든 놓친 부분은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가부장제가 여전히 공고히 자리 잡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다양성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라서 고등학교 졸업까지 근 20년을 이 사회에서 보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자란 부분은 끊임없이 배우고 거듭 의문을 제기하는 일 역시 해나가려 한다. 이 모든 것들이 어디든 내가 발 디디고 사는 곳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일에 힘을 보탤 수 있게 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다큐멘터리 제작이든 도서 집필이든 그 어떤 것이 되었건 내가 하나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해낼 때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익숙한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것이 더 많은 장소에서 생활인으로 사는 경험을 할 때마다, 나는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어떤 식으로든 만나게 된다. 누군가가 “이미 해둔 걸 토대로 동일한 작업에 그냥 정착해도 될 텐데요”, “그렇게 계속 이동하면서 살면 힘들지 않나요? 한곳에 정착할 생각은 없어요?”라고 물을 때마다 매번 질문은 달라도 나의 답변은 같다. 나는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오늘도 내가 나눌 수 있는 새로운 이야기를 찾고, 새로운 곳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