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배낭을 꾸렸던 건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었다. 그해 뉴스에서 ‘폭염’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던 날, 나는 내 방에 앉아 몸통보다 큰 배낭에 짐을 꾹꾹 눌러 담고 있었다. 턱 밑으로 땀이 뚝뚝 떨어졌지만 입가엔 웃음이 가득했다. 중학생 때부터 간절하게 꿈꿨던 배낭여행이었다. 겁도 없이 서울보다 더 덥고 더 습한 상하이로 떠났다. 내리쬐는 강렬한 태양을 뚫으며 한 달간의 중국 여행이 이어졌다.
벌써 17년 전의 이야기다. 감히 그럴 거라 생각조차 안 했지만 첫 여행은 내게 조금도 실망할 틈을 주지 않았다. TV나 책에서만 보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도 신기했지만, 무엇보다 여정 내내 쌓여갔던 ‘경험의 가치’는 나의 마음을 세차게 두방망이질했다. 한 발자국을 내디딜 때마다 새로운 장면이, 새로운 사람이, 새로운 문화가 나타났다. 나는 오감을 활짝 열어젖힌 채 새롭게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오롯이 흡수했다. ‘다름’의 차이를 인정하는 동안 편견은 사라지고 한계는 무너졌으며 사고는 깊어졌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여행의 기억은 시도 때도 없이 마음속에 단비처럼 내렸다. 이후 의심할 여지없이 여행에 중독되었고, 나는 청춘의 대부분을 길 위에서 보냈다. 물론 여정이 항상 수월한 것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길 위보다 더 재미있고 흥분되는 곳은 없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끊임없이 여비를 벌고 여행을 하느라 대학을 9년 만에 졸업했을 정도다. 이토록 여행을 사랑했던 청년이었기에 나는 내 짧은 인생에 있어 가장 힘든 시기에도 자연스레 여행을 택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내게 많은 영감을 안겨준 아버지께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셨고, 뒤이어 어릴 때부터 나를 보살펴 주셨던 외할머니께서 아버지를 따라가셨다. 다리가 휘청거렸지만 나보다 더 아파한 건 어머니였다. 나에겐 아버지이자 할머니였지만 어머니에겐 남편이자 친정엄마였다. 어머니의 마음엔 깊은 생채기가 났고, 그 상처를 치유하고자 나는 어머니와의 여행을 결심했다. 내가 여행을 하며 당시의 많은 고민과 걱정거리들을 희석시켰듯이 어머니의 아픈 마음도 여행으로 보듬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오랜 설득 끝에 내가 만 서른, 어머니가 환갑을 맞이한 해에 나는 생전 처음 어머니의 손을 잡고 길 위에 섰다. 언제든 힘들면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한 채 나의 첫 여행지였던 중국으로 떠났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어머니는 초반부터 주눅이 들었고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아들도 우왕좌왕했지만 날이 갈수록 모자의 여행은 긍정적인 파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특히 어머니의 극적인 변화는 놀라웠다. 웃음을 잃고 아파하던 어머니는 일주일 만에 길 위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응어리졌던 아픔들을 길 위에 하나씩 흩뿌리기 시작했다. 결국 잠정적인 목표였던 한 달간의 여행이 끝나자, 내가 첫 여행을 마치고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는 여행에 완전히 빠져들어 이렇게 외쳤다.
“원준아, 엄마는 살면서 처음으로 내일이 막 궁금해져!” 이 한마디에 내 마음엔 폭풍이 몰아쳤다. 30년간 가족을 위해 작은 식당에서 반복된 삶을 살았던 어머니는 당장 내일 무엇을 볼지도 모른다는 설렘에, 당장 내일 누구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여행의 마침표를 찍고 싶지 않아 했다. 그 마음을 잃은 나는 한국이 아닌 동남아시아로 항로를 변경했다.
그길로 어머니와 나는 세계를 누비는 방랑자가 되었고, 내가 모았던 모든 돈이 다 떨어질 때까지, 누나가 어렵게 모아서 보내준 돈이 바닥날 때까지 여행은 무려 300일간 이어졌다. 항상 단체 숙소에서 쪽잠을 자고 시장에서 저렴한 현지 음식을 사 먹으며 고된 여정이 이어졌음에도 어머니는 육십 평생 배운 것보다 길 위에서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느낀다며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여행이 끝났을 때 어머니의 상처는 아물었고, 그 과정을 지켜본 나 역시 아팠던 마음이 말끔하게 치유되었다. 나아가 여행이 끝나고 난 뒤, 나는 감사한 분들의 관심과 도움 덕에 어머니와의 파란만장한 여행기를 두 권의 책으로 낼 수 있게 되었다. 책을 내고자 떠난 여행은 아니었지만 결국, 늘 여행을 꿈꾸고 사랑했던 청춘은 우연한 기회에 여행작가가 되었고 지면과 강연, 또 방송을 통해 여행의 즐거움을 전하는 것이 업이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길 위에서의 삶을 지향하며 여행자로 살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역시 여행 중이다. 우리나라에서 멀지 않은 어느 나라의 눅눅하고 습한 숙소에 앉아, 조금 전 도시 전망대에서 사온 기념품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글을 쓰고 있다. 평생 여행을 하며 산다는 게 얼마나 꿈같은 일인지 잘 알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욕심을 조금 내려놓고 그 꿈을 좇으며 살고 있다. 그렇게 나는 17년째 여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