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잠시 세월을 쓰다듬듯 기타를 어루만지며 지난날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1936년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한의사인 할아버지와 의사였던 아버지 아래에서 유복하게 성장했다. 이후 6.25전쟁이 발발했고 1․4후퇴 때 북에 어머니와 여동생들을 남겨둔 채 아버지, 남동생들과 함께 월남하여 대구에 터를 잡았다. 아버지는 미군부대 장교 식당 접시닦이로, 그는 하우스보이로 일하면서 낯선 환경과 현실에 직면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하우스보이로 일하던 친구가 쉬는 시간에 하모니카를 부는 모습을 보고 ‘바로 저거다’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축구선수가 꿈이었던 그에게 음악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뿐히 찾아온 것이다.

“아버지는 색소폰, 아코디언, 기타 등을 연주하며 음악 활동도 열정적으로 하셨어요. 제가 처음으로 배운 악기는 만돌린이었는데, 아버지는 악보 보는 법, 주법 등을 가르쳐주셨고, 6개월 정도 연습하다 보니 웬만한 연주는 가능해졌죠. 하루는 치과의사 겸 기타 연주자인 아버지 후배 한 분이 오셔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셨어요. 순간 ‘와! 신세계다!’라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빛이 번쩍 했죠. 그때부터 기타에 빠져들었고, 매일 새벽까지 연습만 했어요. 정말이지 기타에만 미쳐있던 시절이었죠(웃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조성된 음악적 환경에서 멋진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었던 청운지지(靑雲之志)는 ‘작곡’이라는 창조 영역의 코드로 전환되어 색다른 인생의 변주곡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의 음악언어와 감성에 귀 기울여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첫 작곡집이 나오던 시절, 보름 정도 레코드사에 나가지도 않고 잠적 아닌 잠적을 했다. 괜히 부끄럽고 두려운 나머지 선뜻 자신의 노래를 들을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날 왕십리 길을 걷다가 이발소에서 흘러나오는 제 노래를 듣고선 온몸이 얼어붙은 듯 정지된 기억이 나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고, 누군가가 야단칠 것 같아서 도피심리가 발동했죠. 난생 처음 방송으로 들은 건데, ‘그걸 노래라고 만들었어?’ ‘이야~노래 좋은데’ 등등 다양한 음성들이 환청으로 들려온 거죠.”

거장에게도 ‘처음’이라는 단어는 낯설고 무겁기만 했나보다. 그렇게 두려움과 대면한 그는 반세기를 넘어 음악을 경외하며 대중들과 소통해왔다. 그리고 세월의 퇴적과 침식과정을 거쳐 2012년, 다른 빛깔의 음악언어들과 조우하고 있다. 대중음악을 감상하는 시대에서 함께 즐기는 시대로 전환된 것이다. 그는 다변화 된 대중음악의 깊이와 높이를 칭찬하면서도 장르의 획일성과 쏠림현상은 지양해야 함을 강조했다. 무엇보다 K-POP 시장이 확대된 만큼 우리만의 색깔과 독창성이 잠재되어 있지 않다면 신드롬에 그칠 우려가 있다고 덧붙였다.

작곡은 순간적인 집중력이 상상력과 만나는 지점에서 폭발하는 작업이라며 멋진 기타 연주와 함께 60년 음악 인생의 서사를 닫은 작곡가 김희갑. 그 음악 여정의 길을 나서며 마지막으로 그의 십팔번이 궁금해졌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친구 박일남의 <갈대의 순정>에서 요즘에는 자신이 작곡한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바람의 노래>를 자주 부르게 된다며 구수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라는 가사처럼 주옥같은 노래로 스스로의 실존을 확인해온 셈이다. 노래 <향수>속 고향도, 실재적 고향인 평양도 아닌 ‘상상력’으로 가꾼 음악적 고향의 뜨락에서.

글. 사진/ 김신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