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도은

 

일하기 좋은 시절이다. 신선한 바람이 불고, 산과 들판은 나날이 초록으로 물들어가고, 꽃들이 피고 지고, 그 자리에는 새끼손톱만한 과일열매들이 송송 달려있다. 달콤한 공기에 꿀벌처럼 취한 나는 괭이와 호미를 들고 밭으로 향하거나 산나물을 뜯으러 간다. 돈 버는 일도 아니고 누구에게 자랑해 보이려거나 경쟁할 필요도 없다. 그저 내 몸에 고대로부터 새겨진 진정한 일을 하러 간다.

 

이 지구에 태어난 인간들은 별의별 일들을 행하고, 저지르며 살아간다. 먹을 것과 잠자리를 구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고, 자잘한 기쁨들과 슬픔들을 경험하는 자연스런 일들도 있지만 대체 왜 저 짓거리들을 해야 할까 싶은 일들도 (아주 많이) 있다. 핵무기와 핵잠수함을 만들고, 핵발전소를 짓고, 유전공학과 ‘첨단’이란 이름의 기술들을 미친 듯이 개발하고 있다.

 

정직한 일 대신에 대다수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연을 파괴해가며 광기어린, 결국은 허망한 대리 만족을 추구하게 하는 세상이 바로 지금의 산업 기술 문명이다. 인류 역사에 등장했던 문명들 가운데 이토록 스스로 무너져가는 무시무시한 문명이 또 있을까.

이 문명의 거대한 파괴하는 힘을 알아차리고서 굴복 대신에 다양한 방식의 저항과 거부를 택한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대체로 체제의 소외자들인데, 아주 소수이지만 내 삶에 크고 작게 영향을 준 스승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급자족을 꿈꾸며 살도록 내게 영감을 준 이들 가운데 이반 일리히가 있다. 자율, 자족, 공생사회가 어떻게 이 자본주의 산업 체제에 의해 파괴되어 왔는지를 꼼꼼히 밝혀낸 사람이다. 또 체제가 어떤 이상야릇한 제도들을 만들어내어 순진한 사람들을 차츰 길들이고 굴복시키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또 한 사람 내게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가 있다. 유나바머로 알려진 테어도르 카진스키. 신념에 찬 직접행동 때문에 국가에 붙잡혀 종신형을 받았으며 지금도 미국 감옥에 갇혀 있다. 카진스키는 자기 선언서에서 어떻게 현대인이 거대 산업 기술체제의 부품이 되어 온순하게 대리만족을 추구하며 살아가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카진스키의 선언서를 번역한 <산업 사회와 그 미래>를 읽어보면, 이 체제의 은밀한 조작과 규제와 세뇌 작용이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살아오면서 내가 이런 스승들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그런데 이 가운데 내가 직접 만난 사람들은 없다. 그렇다면 직접 만난 사람들 가운데 내 스승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글쎄, 누가 있을까. “윽! 적어도 저렇게 살지는 말아야지.” 싶은 ‘반면 스승’들은 많이 만났다.

 

‘녹색’을 팔아먹는 이들, ‘녹색’을 실천하는 일보다 쉬우면서 돈도 되고 살짝 고차원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깨달음’ 운운 쪽으로 가버린 사람들, ‘녹색’도 국가나 힘 센 조직과 손잡아야 한다면서 온갖 프로젝트들을 들고 체제 밑으로 들어가서 실제로는 자기 생존과 삶의 허망함을 보상받으려는 이들이 나의 반면 스승들이다.

 

아, ‘에이(A)’가 있다.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얻는 일에서 나는 그에게서 많이 배웠다. 십여 년 전에 내게 이 체제를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가지라고 충고해준 것도, 은폐된 채 끈질기게 남아 있는 계급 제도로부터 해방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함께 토론한 것도 에이였다.

 

그 밖에도 이 땅과 저 하늘의 갖가지 자연 현상들이 진짜 스승들이다. 안개, 바람, 강물, 비, 태양과 달과 별들… 이처럼 살아 있든 아니든, 인간의 몸을 입었든 아니든, 내 삶에 힘을 준 스승들이여, 축복 받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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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은 님은 산골에서 자급 농사를 지으며 가끔씩 번역도 하고 글도 쓴다. 쓴 책으로 《없는 것이 많아서 자유로운》, 《꿈꾸는 씨앗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