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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교양/종합

정간물명

월간에세이

게재월

2013년 11월

제목

"건반을 수놓는 선율의 비행" ㅡ아름다운 人터뷰 / 막심 므라비차, 피아니스트

한 마리의 왕벌이 피아노 건반으로 만개한 음악의 정원을 날아오른다. 숨 막히듯 빠르고 미끄러지듯 높은 이 왕벌의 비행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막심 므라비차(Maksim Mrvica, 39)의 손끝에서 온몸으로 퍼지는 음악의 시어로 함축된다. 그 언어로 빚어낸 포말들이 오감에 감기면, 우키요에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의 장엄한 파도가 점염되듯 밀려온다. 날렵한 선묘, 기억과 망각의 새김보다 강렬한 그의 연주는 관객과의 낮은 담조차 허용하지 않고 역동적인 소통의 길을 열어준다. 이 거침없는 음들의 군무는 2013한국투어(9.25~10.8)를 통해 다시 한 번 증명됐다.
그의 무대는 1초에 16개의 건반을 치는 화려한 속주로 <왕벌의 비행(The Flight of the Bumble Bee)>, 베르디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 2막에 등장하는 대장간의 합창을 편곡한 <더 집시 메이드(The Gypsy Maid)>, <엑소더스(Exodus)>, 톤치 훌치크(Tonci Huljic)의 몽환적인 곡 <차일드 인 파라다이스(Child in Paradise)><크로아티안 랩소디(Croatian Rhapsody)>, 영화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의 테마곡 등, 클래식부터 영화음악을 재해석 한 레퍼토리로 꾸며졌다. 특히 서울 공연에서는 7인조 밴드와의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었다. “스크린 영상과 어우러진 무대는 어느 때보다 다이내믹하고 열광적이었다”며 그날의 감동과 흥분을 전한 그를 삼성동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만나보았다. 190cm의 키에 수려한 외모를 지닌 그는 인터뷰 내내 진중하면서도 유쾌한 모습으로 특유의 카리스마를 발산했다. 저음 보이스에 실린 음악에 대한 진정성은 오랜 시간 퇴적과 침식을 거쳐 다져진 음악의 지층위에 놓여있었다. 불안과 결핍이 예술창조의 동력이라면 겉으로는 부족해 보이지 않는 그에게도 이 말이 적용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유고내전(1991~95년)이 가장 특별하면서도 강렬한 경험이죠. 제가 살던 시베닉(Sibenik)은 해안도시라 적군이 쉽게 닿았고, 매일 폭탄이 떨어져서 위험했어요. 가족들은 전쟁의 공포와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죠. 몇 년 간 지하실에서 지내면서 온종일 밖에 나가지 못할 때도 많았으니까요. 당시에는‘그렇게 해야 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살았던 거예요.”
1989년 동구권의 붕괴로 민주화가 본격화되고 유고연방이 분리·독립되는 과정에서 내전을 경험한 그는, 정신적 유산과 같은 심리적 고통과 갈등을 ‘크로아티안 랩소디’에 절실히 담아냈다. 대중과 평단의 극찬을 받은 이 곡은 가녀리면서도 생명력 넘치는 그의 손가락처럼 포화 속에서 피어난 진한 꽃향기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다. 이처럼 칠흑 같은 어둠을 비춰준 달빛은 다름 아닌 ‘피아노’였다. “내전 중에도 음악학교 지하실에서 레슨을 받았다”는 그는 삶을 긍정하고 증명하기 위해 여든 여덟 개의 피아노 건반 위에 뜨거운 시간을 흩뿌려 놓았다. 불안과 결핍으로 함몰된 생(生)은 음악으로 봉합되고, 봉인된 시간은 해제되었다. 이에 결정적인 도화선이 된 것이 ‘자그레브 음악콩쿠르 우승(1993)’이라고 한다.
“아직도 그때의 환희를 잊을 수 없어요. 치열한 승부로 자신감과 성취감을 얻은 첫 경험이자 제 생애 가장 극적이고 역사적인 순간이었죠. 이를 계기로 훌륭한 스승을 사사할 수 있게 됐고, 제 삶은 즉각적으로 변했어요.”
여덟 살 때 친구 집에서 피아노를 처음 접한 그는 그것이 물질성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을 연소시킬 수 있는 도구 이상의 묵직한 힘을 지니고 있음을 예감했다. 그 첫 만남은 피아노가 그를 그가 피아노를 ‘선택한’ 운명적인 조우였다. 아홉 살 때 정식으로 레슨을 시작한 후 니콜라이 루빈슈타인 국제피아노콩쿠르(1999)에서 수상했고, 크로아티아 최고의 피아노 교수인 블라디미르 크라판을 사사한 뒤 명문 프란츠리스트 음악원에서 유학했다. 이후 파리 퐁트와즈 피아노콩쿠르(2001)에서도 1등을 차지했고, 데뷔앨범 (2002)를 발표하면서 크로아티아 역사상 최단기간 베스트셀러 음반을 기록 하기도 했다. 이로써 크로아티아 최고 권위의 포린 어워즈 ‘최우수 클래식 앨범’을 비롯해 총 4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또한 자신의 곡을 작곡한 훌치크를 통해 바네사 메이, 본드를 키운 프로듀서 멜 부시를 만나면서 그의 음악 여정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멜 부시의 기획으로 첫 크로스오버 앨범인 (2003, EMI)를 발매하여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것이다.
“전 세대가 공감하는 클래식 음악을 하고 싶어요. 한국의 오케스트라 연주를 본 적이 있는데, 정말 대단했어요. 그만큼 한국의 젊은이들을 어필할 수 있는 대중성을 잠재하고 있다고 봐요. 너무나 방대한 피아노의 세계에서 얼마든지 다채로운 음악을 펼칠 수 있듯, 제 음악 역시 하나의 색으로 규정지을 수 없죠. 이는 곧 음악의 무한한 가능성을 뜻하는 거예요.”
거대한 음악 산업은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경쟁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성공적인 쇼 비즈니스를 위해서는 일희일비하지 않고 빠른 변화와 기복에 대비해야 한다는 그에게서 프로의 자세가 엿보였다. 자신이 무대에서 내뿜는 에너지와 관객의 열정적인 에너지가 순환하며 교차되는 지점에서 진정한 소통과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그는, 피아노가 운명이고 유일한 꿈이기에 한 번도 다른 꿈을 그려본 적이 없다고 한다. 다시 한국을 찾을 것을 약속하며 인터뷰의 문을 닫은 그는 유럽과 중국 등으로 연주여행길에 오른다. ‘Child in Paradise’에 흐르는 감성의 물줄기를 따라 여전히 비상하는 소년의 꿈을 간절히 붙잡으며.

글/사진. 김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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