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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종합

구분  교양/종합
정간물명   월간에세이
게재월   2013년 08월
제목  "서서히, 치열하게 영글어가다.." - 아름다운 人터뷰 / 최수형, 뮤지컬 배우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는 문장으로 소설의 문을 열고 있는, 영국의 대문호 찰스 디킨스의 명작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 18세기 후반 런던과 파리를 배경으로 펼쳐진 거대한 서사는 정치․사회적 격변기에 견고한 뿌리를 내리고, 그 속에서 가까스로 피어오른 ‘사랑’을 증명한다. 이 첫 문장은 시대의 방증이자 작품 전체의 농도를 측정하는 중요한 도구로, 150년 전의 눅눅한 책장에 박제되지 않고 현재성을 확보한다. 이는 다시, 원작의 역동성을 내재한 동명의 뮤지컬로 부활하여 수많은 관객들에게 묵직한 주제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단단한 작품의 지층에는 폭발적인 가창력과 작품해석으로 자신만의 캐릭터를 완성해가고 있는 배우가 있다. 바로 ‘찰스 다네이’역의 최수형(35)이 그 주인공이다. 풍기는 인상처럼 주로 남성성이 부각된 역을 맡아온 그는 <노트르담 드 파리><사랑은 비를 타고><쓰릴미><삼총사><아이다><넥스트 투 노멀> 등을 통해 배우로서의 지평을 넓혀왔다. 특히 전작인 <아이다>에서는 라다메스 장군으로 열연하면서 남성적이고 강렬한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명료한 자기색을 입었다. 그래서일까. 이번에 맡은 ‘찰스 다네이’라는 변수가 ‘최수형’이라는 상수와 어떤 함수관계를 이룰지 관객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지난 6월 재연의 막은 올랐고, 새로운 캐릭터에 대입한 함수는 관객들과의 소통과 공감으로 이어졌다. 어쩌면 스스로의 형질에 균열을 일으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고정된 틀을 깨뜨리는 것이 배우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 고민과 갈등의 궤적에서 ‘앞으로 조금씩’ 흔적을 남기는 작업이야말로 배우의 생명력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그가 “천천히 가되, 절대 뒤로 물러서지는 말자”는 좌우명을 품은 것도 정점을 찍고 내려오기 보다는 정점을 향해 전진해 나가는 시간 속에 좌초되지 않기 위함이다. 이번 작품을 선택한 이유도 작품 자체에 대한 힘은 물론이고 ‘새로운’ 캐릭터에 대한 갈증이 상존해 있어서였다.
“라다메스는 전쟁 좋아하고 밖으로 떠도는, 그야말로 상남자예요. 아이다를 만나면서 그녀를 위해 희생하는 지고지순한 면도 있지만요. 그런데 찰스 다네이는 표면적으로도 부드럽고 곱상한 귀족이죠. 원작을 두 번 넘게 읽고 부분적으로도 여러 번 읽으면서 꼼꼼히 분석했는데, 그의 결단력과 의지에서 외유내강의 남성성을 발견했어요. 귀족 신분을 포기하고 영국으로 넘어가 프랑스어 선생 노릇을 할 정도로 파격적인 행보를 하니까요. 사실 이 방대한 이야기가 함축적인 무대로 옮겨지면서 소설 장면들이 제거되는 것은 어쩔 수 없기 때문에 그 공백을 채우며 설득력 있는 캐릭터로 표현해 내는 것은 제 몫인 것 같아요.”
작품 이야기가 무르익어가자 그의 눈빛은 점점 더 빛났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이 매력적인 고전을 만나기 전까지의 자신의 히스토리를 맛깔나게 들려줬다.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영천과 대구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그는,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본인의 노래를 인상 깊게 지켜본 담임선생님의 추천으로 성악에 입문했고, 대학에서도 성악을 전공한다. 이후, 김천시립합창단, MBC합창단에서 활동하며 무대에 익숙해질 무렵 다시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우연히 뮤지컬 오디션을 보게 됐고, ‘노래’만 해왔지 ‘춤’은 서툴러서인지 두 번의 오디션에서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그러나 좌절도 잠시, 전문 가수와 댄서를 명확히 구분한 <노트르담 드 파리>(2008)의 ‘페뷔스’ 역을 꿰차면서 화려하게 데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뮤지컬이라는 장르적 특성상 ‘몸의 언어’를 구사해야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모든 게 낯설고 어색했다고 한다. 이는 어릴 적부터 내성적이고 소심해서 대범하게 자신을 표현하지 못했던 성격에 연유한다.
“유치원 시절에는 쉬는 시간에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대요. 물론 성장하면서 군 제대 후, 또 배우생활을 하면서 많이 변했고, 지금은 팀의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고 있지만요(웃음). 제가 보기와는 달리 다정다감하고 유쾌하거든요. 막내라서 부모님과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고, 어릴 때는 어머니 빨래를 도울 정도로 애교도 많았어요. 온실 속 화초까지는 아니고 잡초 정도로 자라왔죠(웃음). 그래서 밝고 긍정적이에요.”
성악을 전공한 첫째 누나와 교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해 선생님이 된 둘째 누나를 비롯해 어머니와 외가 친척들이 모두 타고난 목소리를 지녔을 정도로 음악과 친화력이 있는 집안 분위기는 자연스레 음악의 길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는 막연히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 꿈과 맞닿기 위해 고등학교 때는 문학반에 들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한때 문학 소년이었고, 지금도 독서와 걷는 것이 취미”라는 감수성 풍부한 그에게 외적 요소는 고정관념에 불과했다.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간극, 여기서 오는 ‘의외성’이 잠재된 매력인 것이다. ‘슈퍼맨’이라는 별명에 아이언맨을 좋아하는 소년 감성에 배인 의외성이 실제 모습이든, 연기적 자아든, 변치 않을 한 가지는 무대에 대한 외경심이다. 연습 때 이것저것 다 시도해보고 무대에서는 되도록 복잡한 계산을 하지 않는다는 그는, 서서히 그러나 치열하게 영글어가고 있다. 작품의 온도와 명도에 흔들리지 않는 여유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쓰릴미>의 ‘나’, <삼총사>의 ‘아라미스’, <아이다>의 ‘라다메스’, 그리고 ‘찰스 다네이’는 분명 연기의 들숨과 날숨의 깊이를 체감하게 했으니 말이다. 어느새 뮤지컬을 향한 집념과 욕심은 그만의 연기문법으로 정의 내려지고 있었다.
“뮤지컬은 한 마디로 ‘생동감’이에요. 그날 관객의 에너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고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되니까요. 그게 일회성과 현장감으로부터 오는 희소성이겠죠. 저도 좋은 공연을 볼 때면, ‘저 무대 너무 환상적이다’라는 생각을 해요. <아이다>에서 아이다와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이 그랬죠. 그런데 그렇게 동경하던 무대에 오르는 순간, 그 장면 속에 살게 되는 거잖아요. 무대가 두려우면서도 흥분되고 황홀한 것은 관객들도 저처럼 감동의 지점을 찾고 공감하기 때문이죠.”
그는 청아하고 깨끗한 목소리를 위해 담배도 피우지 않고, 공연기간 중 금주는 철칙이라고 한다. 뮤지컬 배우는 목소리를 담보로 무대에 오르기 때문이다. 정통 성악 발성위에 실용음악 창법을 덧씌워 세련되고 편안한 음색으로 다가오는 그는, 지금껏 써온 것보다 써나가야 할 것들이 많은 배우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작품 일기에는 어떤 꿈들이 활자화되어 있을까.
“일단 제게 있어서 최고의 작품인 <두 도시 이야기>에 참여해서 기뻐요. 기회가 되면, 시드니 칼튼 역과 연극에도 도전해보고 싶어요. 앞으로 관록이 쌓여 중후한 멋을 풍기는 배우가 되기 위해 노력할 거예요. 저를 찾는 무대만 있다면 언제든 달려갈 준비가 돼 있어요.”
스스로를 어떤 것을 그려도 잘 어울리는 ‘흰색’으로 명명한 서른다섯의 순수한 배우 최수형. 새하얀 캔버스위에 무한한 꿈으로 펼쳐질 그의 무대는 ‘Open Ended’였다.


글/사진. 김신영 기자
copyrightⓒ월간에세이
장소:신사동 머그포래빗(Mug for Rabbit)





           [출처] 월간에세이 (20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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