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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종합

구분  교양/종합
정간물명   월간에세이
게재월   2013년 08월
제목  ‘나’를 만나러 가는 길 - 에세이 초대석 / 고민정, KBS아나운서






날이 덥다. 연일 뜨거운 태양이 아스팔트를 데우고 그 열기는 공기를 후끈하게 만든다. 발부터 머리끝까지 열선이라도 깔아놓은 듯 뜨거운 기운이 온 몸 가득하다. 그리고 마음까지도.
방송에 얼굴을 비추는 사람들은 쉽게 늙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의학의 힘을 빌리는 이들도 있겠지만 10년을 지켜본 결과 계속되는 변화와 그로 인한 긴장감은 마음 뿐 아니라 얼굴까지도 탱탱하게 유지해주는 듯하다. 예전엔 1년에 봄, 가을 2번 시행되던 개편도 이젠 수시로 이루어진다. 그 말은 지금 하는 방송에서 언제 마이크를 내려놓아야 할지 모른다는 얘기다. 이렇게 매일매일 외줄타기 하듯 긴장 속에 지내다보니 얼굴도 늙을 새가 없다. 덕분에 따로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동안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은 나이가 들면서 연륜과 함께 깊어져야 하는데 마음마저도 너무 팽팽하다. 스무 살 때 친구의 말 한마디에 크게 상처 받듯 누군가 써놓은 댓글 한 줄에 울고 웃는다. 내 방송을 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일그러지진 않는지 신경이 온통 곤두서 있다.

4년 전 이맘 때였다. 작은 바늘이 스치기만 해도 곧 터져버릴 것 같은 풍선처럼, 개미 한 마리만 매달려도 끊어질 것 같은 끈처럼 내 마음은 위태로웠다. 그래서 난 스스로 풍선을 터뜨리고 끈을 끊어버린 채 중국으로 떠났다. 터지길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리느니 내 삶은 내가 직접 만들고 싶었다. 1년 동안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 일대를 돌며 때론 또 다른 나를 만나 안쓰럽기도 했지만, 때론 그동안 알지 못했던 내 안의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어 반갑기도 했다.
진시황릉(秦始皇陵)에 있던 병마용은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처음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플래시를 여기저기서 터뜨리지만, 이내 아무도 없는 텅 빈 공간에 홀로 남겨졌다. 사람들의 플래시 세례를 많이 받은 병마용일수록 그 쓸쓸함은 더 깊어 보였다. 기차여행에서 본 젊은 아빠와 세 살짜리 어린 딸은 나와 말 한 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내게 가족이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소중한 존재들임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2013년 오늘. 이미 한 번 많은 걸 버리고 채우는 여정을 거쳤건만, 날 닮은 아이도 생겨 가족이 한 명 더 늘었건만 여전히 불안하고 위태롭다.
‘자기(self)는 의식 또는 자아와 집단 무의식까지를 포함한 무의식 전부를 통합하는 핵심이다. 자기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 자기실현으로, 인간의 삶은 바로 자기를 실현해나가는 과정이다.’
분석심리학의 이론을 전개한 칼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의 말이다. ‘심리학’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사람인 프로이트를 아버지처럼 따랐고, 프로이트 또한 자신의 후계자가 되기를 바랐던 수제자 융은 학문적인 용어가 아닌 인생 선배가 해줄법한 저 말을 남겼다. 더운 여름 밤 은은하게 켜 놓은 아로마 향초 하나로 더위를 식혀줄 수는 없지만 마음만큼은 차분히 가라앉혀주는 것처럼 기분 좋은 향기가 몸속을 가득 메우는 느낌이다.

나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 바로 삶이라는 말, 얼마나 매력적인가. 어렸을 땐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초능력이 참 탐났다. 누구와 사랑에 빠지고,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모습으로 늙어 가는지 미리 알 수 있다는 건 참 매혹적인 일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내일의 일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내일을 기대할 수 있고, 하고 있는 일의 결과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혼신의 힘을 기울일 수 있고 그에 따른 보람을 만끽할 수 있으니 말이다.
4년 전 여행에서 찾은 나는 그저 나의 일부분일 뿐이다. 아직 발견하지 못한 눈부시도록 매력적인 내가 내 안에 아직 숨어있다고 생각하니 짜릿하기까지 하다. 친구 같은 엄마가 되어 아이와 함께 세계를 누빌 수도 있고, 시인 남편을 수행하는 비서가 될 수도 있고, 경치 좋은 곳에 예쁜 집 한 채 지어놓고 강산을 품에 안으며 살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copyrightⓒ월간에세이





           [출처] 월간에세이 (20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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