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라디오에서 이런 사연이 소개되었다. “전 30대 아기 엄마인데요, 경제적으로 풍족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가난한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꽤나 잘사는 한 친구가 자기 아기가 입던 옷과 물건들을 준다고 하길래 받는 입장이니 집으로 직접 가겠다고 했죠. 그런데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사람이 안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전화를 했더니 너무 답답해서 잠깐 나왔다고 기다리라는 거예요. 그래서 기다렸죠. 그런데 1시간이 지나도 안 오는데다 아기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와야 할 시간이기에 다시 전화를 했죠. 그랬더니 그 친구가 공짜로 받으러 오는 주제에 그깟 한 시간도 못 기다리느냐면서 다음에 다시 오라는 거 있죠?”

여기까지 들었을 때는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나, 친구도 아니네 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나의 고민은 이 사연에 대해 얘기하는 DJ의 말을 들은 후부터였다. “사실 요즘에 자기애한테 남이 입던 옷 안 입히지 않나요? 엄마가 직접 사서 입히지.”

DJ의 말인즉슨 친구에게 함부로 말한 그 부잣집 친구가 잘못하긴 했지만, ‘남의 옷 입히는 건 옛날 일이지 않나’였다. 순간 가슴 속에 돌덩어리가 쿵! 아기가 태어난 지 1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 우리 집 아기 옷장에는 내가 산 옷보다 친구의 아기들이 입던 옷이 3배쯤 많고 장난감은 대부분 누군가에게서 물려받은 것들이다. 기껏해야 1년밖에 못 입는 옷, 아기가 가지고 놀아줄지도 알 수 없는 장난감들을 몽땅 새로 사는 건 낭비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그 돈으로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에 쓰거나 차곡차곡 모아 아기가 더 컸을 때 꼭 필요한 물건을 사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DJ의 한마디는 세상에 부러울 것 하나 없던 우리 모자를 거리의 부랑자로 내모는 듯했다. 엄마가 해주는 거라면 뭐든 다 좋아하는 아기를 바보로 만든 것 같아 머리가 띵했다.

누구에게나 하루하루는 새로운 날들일 테지만, 엄마가 된 지금의 내게 그 하루는 더 이상 지루하게 반복되는 하루가 아닌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설레게 하는 첫 마음의 하루다. 마치 그와 첫 키스를 하던 그날처럼 1분 1초가 폭죽이 터지듯 꽃망울이 열리듯 두근거림의 순간과도 같다. 오늘은 아기가 온전한 한 톨의 밥알을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을까, 오른발만 겨우 떼던 녀석이 왼발도 뗄 수 있을까, 엄마 말고 어떤 새로운 단어가 저 작은 입에서 튀어나올까. 하지만 빛이 있는 곳엔 항상 그림자가 따라다니듯 이런 설레는 마음 뒤에는 근심, 걱정이 반드시 존재한다. 이미 밥을 먹어야 할 때인데 아직도 죽을 주고 있는 건 아닌지, 아기의 발달단계에 맞춰 장난감을 사줘야 하는 건 아닌지, 아직 말은 못하지만 영어동요를 들려주고 듣든 말든 동화책을 읽어줘야 하는 건 아닌지, 엄마인 나의 무지로 아기가 뒤처지는 건 아닌지 매일 내게 묻고 또 묻는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책 속에서 말기 암에 걸려 죽음을 목전에 둔 5살짜리 어린아이가 한 말을 보게 됐다.

‘전 제 건전지가 다될 때까지 열심히 살 거예요.’

우리는 모두 엄마의 뱃속에서 교체할 수 없는 단 하나의 건전지를 받아 세상에 태어난다. 그 건전지가 언제쯤 다 될지 아무도 모른다. 아기의 건전지가 엄마의 것보다 더 짧을 수도 있음은 상상조차 못한다. 그저 내 아이가 더 똑똑했으면, 더 잘 살았으면, 더 예뻤으면 하면서 욕심만 부린다. 어쩌면 오늘 받은 엄마의 따뜻한 포옹이, 사랑이 가득 담긴 눈길이 아기에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데 말이다. 친환경 소재로 만든 고급 장난감보다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엄마의 몸이 아기에겐 더 갖고 싶은 장난감일 수 있는데, 유기농 순면으로 만든 비싼 옷보다 원래 한몸이었던 엄마의 보드라운 살결이 아기에겐 더 부비고 싶은 옷일 수 있는데 말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단 한 번 찾아오는 생의 건전지가 다 되는 날, 그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후회 없이 사랑하고 싶다. 남편이 사줬던 비싼 선물보다 첫 입맞춤의 따스함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아있듯, 추운 겨울날 날 안아주던 그의 품이 숨넘어가게 행복했던 것처럼 난 오늘도 온 마음을 다해 아기에게 사랑을 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