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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공연

구분  문화/예술/공연
정간물명   월간에세이
게재월   2016년 01월
제목  자연은 거대한 학교다 / 유지성, 런엑스런 대표


달리기가 ‘인생의 결정판’이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과거에는 ‘너무 철학적인 말 아니야?’하고 생각했지만, 15년 정도 전문적으로 달리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그 말에 수긍이 간다. 2002년부터 사막을 달리며 여러 가지 색다른 경험을 했는데 그중 가장 잊을 수 없는 한 번이 2009년의 사하라 사막이다. 어느 날, 캐나다에서 긴급 요청이 날아왔다. 시각장애인이 사하라 사막 레이스에 출전하는데 아무래도 경험 많은 당신이 도와주면 좋겠다고 했다. 메인 도우미가 있고 나는 보조자로 안내만 해주는 쉬운 업무라기에 참여하기로 했다. 시각장애인 론, 그의 안내인이자 봉사단체 대표인 탐과 함께 팀을 만들었는데, 알고 봤더니 이 친구들의 마라톤 기록이 3시간으로 아마추어 수준에서는 꽤 고수들이었다.
대회 첫날, 장거리 레이스이고 처음 참가하는 것이니 천천히 적응하며 달리라는 나의 충고와 부탁은 허공으로 날아가고 이 친구들은 처음부터 미친 듯이 달렸다. 사하라 사막 레이스는 하루 평균 40㎞ 이상, 총 250㎞ 전후의 거리를 달리든지 걷든지 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 거리 환산은 지도상에 선을 긋고 직선거리로 계산하기에 코스에 따라 1.5~2배를 더 곱해야 실제 거리가 된다. 그래서 누가 끝까지 버틸 수 있느냐와 사막에 몸이 빨리 적응하느냐가 핵심이다. 특히 사막은 가시거리가 좋아서 목적지가 가까이 보이는 착각이 들어 절제를 못 하면 미친 듯 달려 에너지를 낭비하다 지쳐 쓰러지게 된다. 그런데 대회 첫날,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는 나의 충고를 무시하고 탐이란 친구가 일반 마라톤 풀코스 달리듯 처음부터 엄청난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함께 훈련을 안 했기에 서로의 속도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는데 이 친구들의 속도와 특이한 달리기 방식에 함께 호흡을 맞추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하루는 어찌어찌 넘겼지만 우려한 상황이 벌어졌다. 첫날부터 무리했던 도우미 탐의 컨디션이 둘째 날부터 급격히 나빠진 것이다. 모래에 발이 휘감기는 50도의 사막에서, 15kg짜리 커다란 배낭을 메고 마라톤 풀코스 3시간대 속도로 달리니 탈이 안 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탐은 3일째부터 아예 도우미에서 빠지고 적응을 완전히 끝마친 나 혼자 전 구간 도우미를 하기로 했다. 합의한 건 아니었지만, 실은 출발만 하면 탐이 어디로 사라져 버리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래도 시각장애인 론이 불안해할까 봐 탐이 주변에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며 꾸준히 달렸다.
그러다 사막 레이스의 꽃인 1박 2일간 거의 100㎞를 가는 ‘롱데이’가 찾아왔다. 출발만 하면 사라지고 골인할 때만 지금까지 쭉 함께한 것처럼 어디선가 나타나는 탐이었지만, 롱데이는 꼭 그에게 맡기고 싶었다. 그래서 롱데이 날 아침 탐에게 진심 어린 이야기를 했다.
“탐, 사막 레이스에서 가장 중요한 날은 바로 오늘이야. 나는 그냥 보조자일 뿐 네가 주인공이라고. 네가 꼭 손잡고 함께 골인해야 여기까지 온 의미가 있어. 더운 낮에는 내가 도우미를 할 테니 시원한 저녁부터 마지막 골인 지점까지 도우미를 해. 밤에는 내가 뒤에서 따라갈 테니 걱정하지 말고.”
고개를 끄덕이며 반드시 그리하겠다는 탐의 다짐을 받고 먼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총 9개 구간 중 내가 먼저 6개 구간을 마치고 탐이 2개를 끝냈다. 마지막 거리는 10㎞ 정도. 이제 얼만 남지 않은 거리를 가면 완주의 90%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마지막 체크 포인트에 도착해서 휴식을 취하고 탐에게 말했다.
“자, 이제부터 너의 시간이 왔다. 멋지게 마무리해.” 그런데 탐은 머뭇거리더니 우리가 안 보는 사이 배낭을 챙겨 도망갔다. 소위 ‘먹튀’를 한 것이다.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자기가 운영하는 봉사단체의 이름을 걸고 자기가 데려온 시각장애인을 힘들다며 남에게 떠넘기고 나 몰라라 도망가다니. 정말 어이가 없었지만 ‘누구나 어려운 환경에 처하면 그럴 수 있겠지’라고 이해하며 길을 갔다. 물론 시각장애인 론에게는 지금까지의 상황에 대해 일체 이야기를 안 했고 언제나처럼 탐이 곁에서 같이 가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골인 지점을 얼마 안 남긴 모래언덕에서 탐을 만났다. 이 언덕만 올라가면 골인 지점이었다. 위치를 보니, 거기서부터 함께 간다면 그 누구도 자신의 먹튀를 의심 못 하는 기막힌 장소를 찾아 기다렸던 모양이다. 그런데 론의 팔을 탐에게 넘기는 순간, 론이 그의 손을 뿌리치고 나의 팔을 잡더니 말했다.
“지성, 내가 그동안의 상황을 모를 것 같아? 다 알아, 같이 가자!”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치며 놀라움과 뭉클함이 밀려왔다. 인종이 다르고 나라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진실 앞에서는 사람은 누구나 같은 감정을 느끼나 보다. 인생은 사건과 사건의 점들이 서로 선으로 연결되어 가는 과정이며, 대자연은 미약한 인간들의 찌질한 행동을 감싸 안으며 반성과 겸손함을 배우게 하는 커다란 학교 같다.





           [출처] 월간에세이 (20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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