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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문화/예술/공연

정간물명

월간에세이

게재월

2016년 01월

제목

고택에 스민 장인어른의 온기 / 김익성, 장욱진미술문화재단 관리이사

장욱진 화백은 애주가로 유명하셨다. 1981년 장인어른의 셋째 딸인 아내와 결혼 허락을 받기 위해 서울 명륜동 화실로 찾아갔을 때도 술이 중매쟁이 노릇을 톡톡히 했다. 당시 무역업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는 사업이 잘되지 않아 힘겨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친구들과 술 마시며 낭인처럼 지내던 나를 장모님은 극구 반대하셨다. 팔 남매 중 장남인 것도 마음에 걸리셨던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는 꿋꿋이 만남을 이어갔고, 용기 내어 장인어른께 인사드리러 갔다.

우리가 찾아뵈었을 때 장인어른은 이미 술을 좀 드신 상태였다. 나를 보시곤 “네가 (술에 대해) 뭐 좀 아냐?”하고 한마디 툭 던지더니 큰 글라스에 양주를 한가득 따라 주셨다. 어려운 자리인지라 마다할 도리도 없고, 객기도 넘치던 때라 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장인어른은 그런 나를 보며 ‘음… 마음에 드네’하고 생각하셨는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화실 밖에서 몰래 동정을 살피던 처가 식구들은 “호랑이 피하려다 곰 만난 격”이라며 난리가 났다. 장인어른은 내가 술 마시는 모습을 보시곤 나중에 “간이 맞다”고 하시더란다. 죽이 맞고 마음이 맞는다는 뜻이다.

장인어른은 그림을 그리실 때면 며칠 밤낮 식사도 거르며 그림에 몰입하셨다. 진이 빠질 때까지 그림에 모든 것을 쏟아 부은 후 그림이 완성된 뒤에야 휴식하듯 술을 드셨다. 술은 장인어른에게 마음의 휴식이었다. 힘든 시절을 보낸 나 역시 술이 주는 안식이 어떤 것인지 이해했다.
그렇게 통하는 면이 있어서 그런지 장인어른은 셋째 사위인 나를 무척 편하게 여기셨다. 목욕탕(수안보 온천탕)에도 어쩌다 함께 가는 기회가 있었고, 당신이 절제하느라 술을 못 드시던 시절에는 나를 만나면 꼭 술집에 데려가 술을 편하게 사 주셨다. 가까운 가족에게도 그림을 함부로 주는 법이 없으셨지만, 우리의 결혼을 허락하고 나서는 결혼에 쓰라며 닭을 그린 그림에 ‘축 결혼 혜수(아내의 이름)’라고 써서 선물로 주셨다. 돌이켜보면 생전에 그만큼 그림 관리를 엄격하게 하셨기에 작고하신 후에도 유작 관리가 잘 됐던 게 아닐까 싶다.
1988년 우리 가족이 홍콩으로 이주하면서 자주 찾아뵙지 못했는데, 장인어른은 2년 후인 1990년 12월 27일 경기 용인시 마북동의 고택(故宅)에서 돌아가셨다. 한동안 고국을 떠나 살던 우리 가족이 2005년 다시 귀국하게 된 것은 장모님의 배려 덕분이었다. “자네가 와서 고택을 지켜주었으면 좋겠네”라는 말씀에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2005년 장욱진 고택을 외부인에게 개방하면서, 1년간 나 홀로 그곳에서 숙식하며 집을 지켰다. 당시 고택은 국가등록문화재 지정을 앞두고 있었는데, 개발 제한에 묶일까 염려한 이웃들이 반대 시위를 하는 통에 분위기가 험악했다. 집이 있는 여의도에서 용인까지 출퇴근하기엔 너무 멀기도 했고, 밤사이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싶어 나라도 상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잠은 장인어른이 직접 설계하신 빨간 양옥에서 잤다. 빈집에 혼자 자면 무섭지 않느냐고 사람들은 물었지만, 머리맡에 걸린 사진 속 장인어른이 웃으시는 얼굴을 보며 왠지 모를 푸근함을 느꼈다. 지금도 거기 살아계셔서 나를 보살펴주시는 것만 같았다.
농담처럼 “장인어른께 술 얻어먹던 빚을 갚겠다”며 시작한 일이었는데, 고택을 지킨 지 벌써 10년째다. 처음 5년간은 전 세계를 휘젓고 다니던 사람이 집에 발이 묶인 것 같아 답답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매일같이 정원에 웃자란 풀을 베고, 꽃과 나무를 가꾸며 나도 어느새 이 고택의 기둥 중 하나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장인어른이 사랑했던 나무와 풀, 새들로 둘러싸인 고택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과 같아서, 계절의 변화와 함께 살아서 숨을 쉰다. 고택에서 매주 일요일 가족 모임을 하는데, 장모님이 가끔 “김 서방, 천국에 사는 기분이 어때?”하고 농담을 건네신다. 그 말씀처럼, 장인어른의 자연 사랑이 담긴 이 천국의 아름다움을 다른 분들과도 함께 나누고 싶다.

장인이 돌아가신 지 25년, 2005년 고택을 개방한 지 10주년을 매듭짓고, 새롭게 다음 10년을 준비하는 2016년부터는 모네의 정원처럼 예술가의 빛이 담긴 장욱진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고 싶다. 2015년 많은 예산을 배정해 양옥과 정원, 담장 등을 수리해준 문화재청과 용인시청의 배려 덕분에 그 꿈을 조금씩 실현에 옮기고 있다. 특히 2016년은 장욱진 화백 탄신 99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기도 하다. 장인어른의 온기가 스민 고택을 잘 가꿔 ‘장욱진의 빛’과 ‘장욱진의 정신’이 무엇인지 방문객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러려면 이제 술도 그만 마시고 더 열심히 고택 정원사 역할에 매진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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