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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공연

구분  문화/예술/공연
정간물명   월간에세이
게재월   2015년 12월
제목  '자신 있다'는 그 말 - 이 한 장의 사진 / 김성연, 사진가


스물다섯, 한쪽 눈을 잃었다. 의료사고였다. 국어교사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내게 교사란 언젠가 무조건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확실한 내 길이었다. 그런데 십 년을 쏟아 부은 꿈이 뜻하지 않은 불행으로 무너졌다. 십 년 넘게 키운 꿈은 포기하는 데도 십 년이 걸린다. 만들고 싶었던 미래와 인생이 한순간에 모두 뒤틀리고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 되어버렸다.
시련이 내게 얼마나 크게 다가오느냐 하는 건 마음먹기 나름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불행의 크기를 곱씹어 음미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덤덤하게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고작 갓 성인이 된 내가 감당하기엔 버거운 무게였다. 머릿속에 틈을 주면 나의 불행이 무의식적으로 떠올라 목구멍 끝까지 숨이 막혔다. 그래서 책을 만든다는 핑계로 더 사진을 찍고 다녔다. 머릿속에 조그만 틈조차 생기지 않게 일을 계속 만들어갔던 내게 사진은 도피처였다.
책을 집필하던 중에 강렬하고 빠른 느낌의 사진이 필요했다. 그래서 복싱을 하는 후배에게서 현재 국가대표로 있는 선수 한 명을 추천받았다. 운동선수라기엔 말끔한 외모의 서글서글한 친구였다. 생각보다 너무 좋은 인물에 정말 실력이 좋을까 의심했지만, 그는 그 해에 전 체급을 통틀어 올해의 선수상을 탔던 유망주였다.
“복싱은 비인기 종목이라 이런 촬영할 기회가 흔치 않은데 저 같은 선수를 찍어줘서 감사합니다.” 예의바른 첫인사가 어쩐지 서글프게 들렸다. 촬영은 르포 형식으로 진행되었고, 덕분에 다양한 종목의 국가대표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
선수들은 새벽에 일어나 산 한 바퀴를 전력으로 뛰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눈을 뜨고 다시 자리에 누울 때까지 식사와 운동의 반복이다. 매일같이 위액이 역류할 정도로 힘든 강도의 훈련을 반복한다. 탈진해서 쓰러지거나 부상을 입는 선수도 부지기수였다. 그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내 인생에서 하루라도 이렇게 빛나게 살아본 적이 있었던가. 하루를 분으로 쪼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사는 그들을 보노라면 나의 지지부진함이 씻겨 날아가는 듯했다. 빛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울함을 곱씹을 틈 따위는 없었다. 나는 어느새 스포츠 사진 촬영에 매료되었다.
이듬해 봄, 세계대회에서 뛸 선수를 뽑는 중요한 시합이 열렸다. 체급에서 1, 2위를 다투는 유망주라 그 친구가 메달을 딸 거라고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뜻밖에도 결과는 예선 탈락이었다. “복싱이나 유도 같은 대련 종목은 운도 필요해요. 어떤 선수의 실력이 세계 랭킹 2위라도 결과가 항상 은메달인 것은 아니거든요. 첫 예선전에서 1위랑 붙어버리면 꼴찌잖아요. 전날 시합에서 체력을 모두 소진한다면 매번 이기던 친구한테 질 수도 있고.”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고, 부상도 잦은 걸 다 감내하면서 노력만큼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닌 비인기 종목을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하진 않느냐고 물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는데 운이 없어 시합에서 지면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래서 재미있는 거 아니겠어요. 억울할수록 억울하지 않도록 더 열심히 해야죠.”
무심하고도 해맑은 그의 말은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었다. 순간 섭섭하다는 답변을 기다렸던 내가 민망해졌다. 갓 성인 티가 나는 어린 친구였지만 불행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다. 마음가짐이 무장된 이에게 힘든 만큼 인생은 어떤 형태로든 보상을 주고, 그것이 쌓인 인생은 남들보다 조금 더 재미있고 보람찬 것이 된다. 그들은 그런 삶을 살고 있었다.
몇 달 뒤, 2차 선발 시합을 앞두고 있던 그가 말했다. “이번엔 자신 있습니다.”
나는 그 말이 대단히 마음에 들었다. 수많은 변수와 운을 이겨버릴 만큼, 자신 있다는 확신에 찬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남들보다 얼마나 더 많이 노력하고 땀을 흘렸을까. 확신에 찬 대답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흘 뒤, 해맑게 웃으며 펼친 그의 손엔 금메달이 쥐어져 있었다.





           [출처] 월간에세이 (2015-12)
           본 콘텐츠는 발행사에서 제공하였으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며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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