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아나운서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운동선수들을 만났습니다. 저 또한 향후 몇 년간 한국 축구를 책임질 손흥민 선수부터 이제는 현역에서 은퇴한 국보센터 서장훈 선수, 2년 연속 홈런왕을 차지한 박병호 선수, 그리고 도마의 신 양학선 선수까지, 동경의 대상이자 누군가의 우상을 직접 인터뷰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또 그 자리를 지키는 일이 얼마나 힘든 줄 알기에 그들과의 만남은 저에게 큰 자극과 영감을 주곤 했습니다.

지난해 말, 저는 3년 동안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습니다. 사표를 내고 제 책상을 정리하다 보니 그 동안 인터뷰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받은 싸인볼과 유니폼들이 생각보다 많더군요. 그동안의 인연들을 곱씹어 보다가 문득 제가 만나보지 못한 인연들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스포츠 아나운서라는 직업의 특성상 주로 만나게 되는 선수는 그날 경기의 수훈선수 혹은 한 종목을 대표하는 스타플레이어들입니다. 패전투수, 결정적인 실책을 범한 선수는 만날 일이 없습니다. 왜 이들의 눈에서 경기를 볼 생각은 못 했을까요? 짐을 싸고 회사를 나오면서 더 넓은 시야로 승부의 세계를 볼 생각을 하지 못한 제 자신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승자가 있으면 패자가 있는, 스포츠는 정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홈런타자의 땀방울이 패전투수의 눈물보다 더 뜨겁다거나, 결승골을 기록한 공격수의 환호가 실점을 한 골키퍼의 허탈함보다 더 크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왜 저는 3년 동안 스포츠 아나운서로 활동하면서 극적인 승리에 환호할 줄만 알았지 실책을 기록한 선수의 눈물을 볼 생각은 못 했을까요? 조금만 시야를 넓혔다면 스포츠현장에서 볼 수 있는 게 많았을 텐데…. 이런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집으로 돌아와 저를 스포츠의 세계로 빠져들게 했던 2002년 한일 월드컵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그 당시에는 기적같이 4강에 진출한 우리 대표팀의 업적만 보였습니다. 특히 가장 극적이었던 스페인과의 8강전이 끝난 뒤 우리는 이운재 선수의 거미손 선방과 홍명보 선수의 환한 미소에 열광했습니다. 하지만 해외 언론이 개최국 특혜와 각종 비리 의혹을 제기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승부차기에 실패했던 스페인의 호아킨 산체스 선수.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호아킨 선수를 당시 ‘승부차기를 실패한 4번째 키커’로만 기억합니다. 호아킨 선수 덕분에(?) 우리가 4강에 진출할 수 있었다며 모든 공로를 그에게 돌리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그 승부차기 ‘한방’은 우리에게 강력한 인상을 심어줬습니다.
하지만 해외 언론에서는 호아킨 선수가 실수한 한방보다는 그의 취소된 득점 포인트에 더 주목했습니다. 당시 호아킨 선수가 올린 크로스를 모리엔테스가 골로 연결시켰지만 그 전에 볼이 골라인을 넘어갔다는 판정에 따라 득점이 무효 처리됐기 때문입니다. 이 판정에 대해 해외에서는 한동안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뒤늦게 선심을 맡았던 토무상게 알리 심판이 오심을 인정하면서 더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점에 대해 이운재 선수의 해명도 있었다는 것도, 당시의 저는 오로지 ‘월드컵 4강’에 진출했다는 쾌거에 취해있었기 때문에 전혀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스페인의 득점 취소, 호아킨 선수의 승부차기 실수, 그리고 심판의 오심 인정, 이운재 선수의 해명…. 이처럼 스포츠는 한 경기만을 갖고도 끊임없는 이야깃거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보는 시각에 따라 한 경기가 ‘4강 진출의 기적’이 될 수도, ‘경기를 지배한 오심의 단편적인 예’가 될 수도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스포츠에선 실수가 있기 때문에 승부가 있는 것이고, 냉정한 승부의 세계도 그만큼 ‘인간적이기에’ 우리는 스포츠에 열광할지도 모릅니다.

스포츠 아나운서를 그만두는 마당에서야 이런 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 못내 아쉽습니다. 그동안은 수훈 선수만 만날 생각을 했습니다. 나머지 선수들의 시각에서 경기를 볼 여유는 없었습니다. 또한 선수 명단에는 있지만 출전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2군 선수들, 선수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식당 아주머니와 팀 닥터. 모두 수훈 선수만큼이나 경기를 위해 헌신했지만 저는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만나보지 못한 인연들에 대한 아쉬움이 가득한 밤입니다.


*1987년 서울 출생. 하버드대학교 역사학과 학사. 前 SBS ESPN 아나운서, SBS Sports 아나운서. UN SDGs 지원 한국협회 홍보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