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지 드릴까요?” 나는 울고 있었다. 강남역으로 향하는 지하철 2호선의 한쪽 자리에 앉아,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눈물을 쏟아냈다. 나는  당시에 뉴욕에서 아트북을 출간하기 위해 현지 출판사들과 연락을 하고 있었는데, 그날 거기서 첫 계약 메일을 받게 된 것이다. 나는 감격에 압도되어 기쁜지 슬픈지 도통 분간할 수 없는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 울고만 있었다. 옆 사람은 내게 휴지를 건넸고, 사람들은 마치 이별 통보를 받은 여자를 바라보듯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삶을 살아보겠다며 모든 걸 박차고 떠나버린 26살.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상상할 수 있었을까. 참으로 무모한 행동이었지만 그것은 순수함 그 자체였다. 이것저것 재거나 따질 수도 없을 만큼 나는 무지했다.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기에 무지만큼 용감하고 강인한 것도 없다. 아무것도 모를 때야말로 진실하게 무언가를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뉴욕에서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틈틈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그것들은 너무나 하찮고 사적인 기록이어서 누구라도 보고 싶어 하지 않았겠지만, 나 역시도 그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온전히 나를 위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그저 나 자신이 즐겁기 위해. 
녹록지 않은 뉴욕 생활의 안식처는 글과 그림, 그리고 책이었다. 현지 서점을 매일같이 들락거리며 언젠가 이곳에 내 책이 놓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상상이 현실이 되었을 때, 내가 받은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벅차게 밀려왔다. 그 일이 지금까지 내게 그토록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나 스스로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출발점을 가졌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모델로서 쇼를 하거나 촬영을 할 때에도 어설펐던 첫 시작이 있었고, 비단 직업과 일에 대한 것이 아니라도 그런 처음의 순간들은 지금까지 끊임없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시작이 그렇듯 처음의 순간은 늘 서툴다. 그러나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익숙함이 가지고 있는 감각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신선하고 활기차다. 새로운 것들은 때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용감하고 무모하게 만들어 버린다.
귀국한 뒤 본격적으로 책을 쓰고 그림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사실 나는 영 가망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시도를 해야 했다. 가망이 있는지 없는지는 스스로가 직접 경험해봐야 했다. 그나마 좋은 점은 이미 내가 바닥의 상태라서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시작의 단계에서만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이 내게는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내가 여기서 시도하지 않고 포기할 이유 또한 없었다.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일단 첫 발을 내디디니 새로운 가능성들이 열리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새로운 경험’ 속에는 아주 많은 선물들이 내포되어 있었는데 그것들은 오로지 첫 발을 내디딘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었다. 
2015년, 에세이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의 일러스트를 시작으로 2년간 5권의 책을 내놓았다. 올봄에는 뉴욕에서 써놓은 글을 모아 에세이집 <내가 누구든, 어디에 있든>을 출간하게 되었다. 첫 책을 출간했을 땐, 다음 책이 나올 거라는 기대조차 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과 그림, 그리고 책 이렇게 세 가지를 마음껏 작업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시작하기에 늦은 때란 없다는 것.’ 내가 서른을 코앞에 두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며 얻은 의미 있는 교훈이다. 어쩌면 늦었다는 말은 시기의 문제가 아닌 마음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이따금씩 ‘너무 늦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밀려올 때면 처음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을 때의 마음을 떠올려본다. 처음의 마음, 그 설레고 호기심 많던 순간을 되새기며 나는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는다. 내가 좋아하는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이런 말을 했다. 
“꿈을 품고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을 시작하라.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용기 속에 당신의 천재성과 능력과 기적이 모두 숨어 있다.” 
그의 말은 두고두고 내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나는 진정 시작하는 첫 마음속에 기적이 들어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그게 어떤 것이라도 나는 피하지 않고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그 첫 순간들을 받아들일 것이다. 할 수 있는 한 더 많이, 더 깊이 처음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가장 어설프지만 가장 순수한 ‘첫 경험’의 순간을 말이다. ‘처음’이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