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 프리랜서 사진기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지도 어언 13년째로 접어든다. 2004년 2월 미국에 있는 ‘코비스’라는 사진 공급사(포토 에이전시)와 프리랜서 계약을 맺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 후 여러 에이전시를 거쳐 지금은 에이전시 없이 완전히 독립된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프리랜서 사진 일을 하면서 개인작업을 위해 그동안 방문한 나라도 많은데, 주로 중동과 아프리카였다. 13년 동안 작업을 하면서 포토저널리스트로서의 정체성이 서서히 확립되어 왔다면, 아마도 나도 모르게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여성들, 즉 ‘전시여성 인권’에 대한 사진취재를 하기 시작했고, 그에 대한 취재를 삶의 목표로 삼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작년 말부터는 시리아 난민 여성의 인권문제를 취재하기 위해 첫 목적지인 그리스로 향했다. 시리아 난민을 그리스에서 취재하는 이유는 유럽연합의 일원인 그리스의 섬들이 터키에서 보트로 짧게는 30분밖에 걸리지 않는 곳에 위치해있기 때문이다. 지도상으로 보면 에게해(海)의 이 섬들이 왜 터키가 아닌 그리스 땅인지 의아할 정도로 바로 옆에 다닥다닥 붙어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난민들이 브로커들에게 두당 300에서 500유로씩을 건네주고 그리스의 레스보스 섬을 비롯하여 코스, 로도스, 사모스 등 수십 개의 섬으로 목숨을 건 항해를 떠난다. 나는 이 섬들 중 ‘히오스 섬’과 해안 도시인 테살로니키 등 두 곳에 있는 네 군데의 난민 캠프를 방문해 난민들을 인터뷰했다.
히오스는 난민들이 터키에서 떠나 처음 도착한 곳이다. 따라서 이곳에서 만난 난민들은 모두 신경이 날카로워져있다. 본인에게 닥친 문제가 너무 클 때에는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진다. 난민들은 언제 섬에서 벗어날지 모르는 불확실성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작년 3월부터 섬에서 자유롭게 떠나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년 3월 중순까지 그리스에 도착한 난민들은 섬을 떠나 테살로니키 등 내륙지방으로 본인들이 유람선을 타고 이동할 수 있었고, 이곳에 온 사람들은 발칸반도 국가들이 국경을 폐쇄하는 바람에 비록 그리스에 오래 갇혀있었지만 속속들이 아테네로 가서 유럽연합 내 국가들도 ‘재배치’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었다. 즉 자신들의 희망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가있는 사람들이었다.
테살로니키의 15개 이상 캠프 중 단 두 군데밖에 가보진 못했지만 이곳 난민들에게서는 히오스 섬의 난민들과 달리 조금이나마 인간성이 살아난 걸 느낄 수 있었다. 조금이나마 더 웃는 얼굴들과 친절함이 엿보였다. 이곳에서는 자신들이 직접 작은 식당이나 상점을 운영하기도 했고 길고양이에게 밥도 따로 주기도하고, 어떤 가족들은 거의 키우다시피 했다.
어떤 아이는 카메라를 보자 “노 포토!”라며 힘껏 소리 지르기도 하면서 사진기자들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반면에 어떤 아이들은 나에게 그리스 간식을 주기도 하고 내가 떠날 때 안아주고 키스를 해주기도 했다. 그 아이들은 특히 나를 만난 다음 날 재배치를 희망하며 아테네로 인터뷰를 받으러 가는 가족의 아이들이었다. 다른 유럽국가로 가서 제2의 삶을 살 꿈에 부푼 가정이었다.
테살로니키의 바실리카 난민 캠프에서였던가, 통역이 나에게 “유럽인들도 이 상황에 처하면 이들과 다름없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이 통역 자신의 말이었는지, 아니면 바로 옆에 있던 시리아 남성의 말을 금방 옮긴 것인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그러나 그때 내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은 “설마…”였다. 금발에 피부가 흰 북유럽 사람들을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유럽은 방대하고 여러 인종이 섞여서 살고 있는데, 나야말로 편견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 ‘유럽인’들도 전쟁 때문에 난민신세가 되어 미래도 없이 난민촌의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살아간다면 과연 그들은 자신의 존엄성을 얼마나 버티며 살 수 있을까.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가, 내가 그렇게 된다면 내 앞에 당장 닥친 일이 중요하지 우리를 돕기 위해 온 NGO 직원들, 하물며 카메라를 들고 찍으러 오는 사람들을 고운 시선으로 볼 수 있을까.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며 그들을 대할 수 있을까.
난민들은 그들을 치료해준 NGO의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치료를 받고 떠날 때에는 항상 “슈크란”이라며 감사의 말을 했고, 나에게도 “슈크란”이라며 예의를 표했다. 어떤 아주머니들은 인터뷰를 마치고 작별인사를 할 때 나를 포옹하며 양 볼에 키스를 해주기도 했다. 물론 문화적 특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내가 그들의 입장이라면 나를 취재하고 가는 기자들을 껴안고 키스해줄 수 있을까. 아무리 난민이라고 손가락질 당해도, 내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져도, 나의 존엄성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것, 그 최소한의 인간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 모든 것들을 다시금 뼈저리게 깨달았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