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살아요.”
육지에 있는 사람을 만나 이 말을 하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기 마련이다. 고향이 제주냐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왜 갔어요?” “뭐 먹고 살아요?” 등의 질문에 답을 해주고 나서야 비로소 일반적인 대화가 가능해진다.
사진가가 되고 싶어서 재학 중이던 대학을 입학한 지 한 학기 만에 때려치우고 그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나를 알리다>라는 사진전을 열었다. 한차례 여행을 다녀와선 서울에 올라가 옥탑방 생활을 했는데, 그만 휴가차 다녀온 제주도에 흠뻑 반해 이듬해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로 내려왔다.
내가 생활하게 된 집은 제주의 동쪽 끝 아주 작은 마을에 있었다. 집에서 나와 30초만 걸어가면 에메랄드빛 바다를 볼 수 있는 정자도 있어서 생각이 필요할 때면 그곳에서 맥주를 홀짝이며 바람을 맞곤 했다. 프리랜서이다 보니 생활비는 간간이 들어오는 촬영 일과 카페에서 하는 아르바이트로 충당했다. 퇴근 후에나 쉬는 날에는 어김없이 카메라를 챙겨 들고 색 바랜 스쿠터와 함께 제주의 풍경을 담으러 다녔다.

제주를 작은 섬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지내던 지역이 동쪽 끝이기도 했지만 제주시나 서귀포시 시내로 나가려면 한 시간, 서쪽으로 가려면 족히 두 시간은 가야 하므로 스쿠터로 장거리는 정말 큰맘 먹고 움직여야 했다. 그렇다 보니 내 ‘나와바리’는 한라산을 넘지 않는 동부 지역이었다. 다행히도 제주 오름의 대부분은 동부지역에 있어서 사진 작업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한 곳은 성산일출봉과 함께 떠오르는 해를 담아낼 수 있는 광치기 해변과 내가 존경하는 사진가 고(故) 김영갑 선생님께서 가장 사랑했다는 용눈이오름이다. 두 장소 모두 집 근처에 이런 장소가 있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감사한 마음이 절로 드는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광치기 해변은 시간에 따라 이끼가 가득한 돌이 보였다가도 사라지고 늦은 밤에는 바다에 별이 가득해지다가 해가 떠오르는 새벽이면 하늘이라는 미술가의 전시장을 찾은 듯 아름다운 그러데이션의 향연이 펼쳐진다. 용눈이오름은 아름다운 여성의 머리부터 가슴, 배, 엉덩이를 지나 허벅지와 종아리까지의 굴곡처럼 매끈한 라인이 유난히 돋보이는데 정상에 오르면 이를 축하받듯 발밑에 수많은 오름 군락이 펼쳐진다.
새내기 도민의 발이 되어준 스쿠터는 동네 가게에서 구매했는데 육지로 올라가기 전 다시 되팔고 가기로 구두계약을 맺고 샀다. 오래돼서인지 내가 워낙 많은 거리를 다녀서인지 모르겠지만 (아마 둘 다이겠지) 고장이 정말 잦아서 오토바이 가게 삼촌(제주는 남자 어른에게 삼촌이라 한다)한테 고치러 가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퇴근하고 들르면 출출할 저녁 시간인지라 삼촌은 동네 어른들과 소주 한잔 할 준비를 하고 계실 때가 많은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숟가락 하나를 더 올려놓곤 하셨다.
육지 사람이 젊은이 하나 없는 외진 마을에 혼자 살다 보니 외롭기도 했지만, 카메라와 맥주를 벗 삼아 고요하고 신비로운 제주 생활을 만끽했다. 변화무쌍한 날씨 탓에 비가 오는 날엔 꼼짝 못 하고 집에만 있어야 했고, 태양이 강렬한 날 반바지에 반소매 티셔츠 차림으로 스쿠터를 타다가 본의 아닌 문신이 생기기도 했다. 억새로 뒤덮인 가을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았으니, 언제 봐도 제주는 아름답다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섬이다.

지금은 제주생활을 정리하고 육지에 있다. 사진 작업을 위해 도민이 되어 그들의 삶에 녹아든 덕에 하나의 시리즈 작업을 마무리하고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다. 사진가로 살아갈 앞으로의 모든 날 동안 겉모습이 아닌 삶 깊숙한 데까지 보여줄 수 있는 사진가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제주의 삶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