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모님은 1986년 대구에서 직물 제직, 가공 회사인 이조섬유를 창업했다. 그리고 대구의 직물 공장들과 계약을 맺어 서울 동대문 원단시장과 수출 바이어들을 상대로 20년간 장사를 해오셨다. 2006년 사업 차 우연히 들른 나주에서 천연염색박물관을 방문한 부모님은 천연염색의 매력에 흠뻑 빠져 염색 장인들을 찾아다니며 염색을 배웠고,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에 500평 규모의 이조자연염색 공방을 열었다. 이조섬유의 제2막이 열린 것이다. 텍스타일을 전공했던 언니도 부모님을 따라 자연스럽게 염색 분야로 전향하면서 가업을 이어갔다.
하지만 나는 평생 먼지 날리는 원단 창고와 잔뜩 쌓인 원단 롤을 보며 성장한 탓에 가업이 지긋지긋했다. 화려한 삶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고, 대학에서 공연 기획을 전공하며 플라워, 와인 등 많은 것을 배웠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살았어도 남는 게 없다고 느껴진 것은 왜일까. 돌이켜보면 난 패기만 넘칠 뿐 욕심이 지나쳐 쉽게 지치곤 했다.

그 무렵 언니의 일을 도와주면서 내게도 터닝 포인트가 찾아왔다. 가업을 이어 이조자연염색 공방을 열고 젊은 CEO로 각광받던 언니는 중소기업청 청년지원사업 등 여러 지원사업 공모에 당선되어 해외 진출까지 한 상태였다.
그때 마침 북경에서 열리는 세계패션박람회 ‘프리뷰 인 차이나’에 언니와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언니는 프레젠테이션 능력이 탁월했고, 나는 타고난 천성과 각종 아르바이트 경험 덕분에 판매에 능했다. 우리는 텅 빈 부스에 스토리를 담아 디스플레이를 완성했고, 500여 장의 스카프를 현장에서 완판했을 뿐 아니라 현지 오더까지 성사시키고 돌아왔다. 그 때 처음으로 내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가슴이 뛰었다.
서울로 돌아와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를 돌아볼 시간을 갖고자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자연과 함께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더는 의미 없는 욕심으로 가득 찬 기계 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귀국한 나는 엄마와 함께 인도 여행을 떠났다. 엄마는 긴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험해도 순리대로 바른 길을 가라”고만 조언하셨다. 어쩌면 내가 돌고 돌아 가업에 함께하게 될 것을 처음부터 아신 것은 아닐까.

나는 마음을 다잡고 천연염색 사업에 눈을 돌렸다. 처음 천연염색 제품을 접했을 때는 모든 것이 촌스러워 보였다. 시장도 크지 않아서 일부 마니아 계층만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염색은 하는 사람의 손맛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지지만, 그렇게 개성적인 염색 직물로 만들어낸 제품은 하나같이 비슷했다. “천연 염재를 써서 건강에도 좋다”는 정도의 장점만 강조하는 천연염색 제품의 한계를 넘어 더 예쁘고 세련된 제품을 만들고 싶었다.
그때 생각해낸 것이 스카프였다. 멋 낼 때 가장 손쉽게 착용할 수 있고, 평상복에도 잘 어울릴만한 색감과 패턴으로 디자인했다.
처음 천연염색 스카프를 가지고 홍대 앞 프리마켓에 참가한 날은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젊은 세대와 외국인, 기성세대까지 모두의 취향을 사로잡았다. 이후로 인사동 쌈지길, 삼청동의 작은 카페부터 서울시에서 주관한 ‘수상(受賞)한 그녀들의 공예길’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여러 프리마켓을 다니며 좋은 반응을 얻어냈다. 원단 관련 일을 20년간 해 오신 부모님 덕분에 질 좋은 원단을 싸게 공수했고, 대폭 원가 절감을 한 덕분에 천연염색 제품은 비싸다는 통념을 깨고 값싸면서도 질 좋은 스카프를 만들 수 있었다.
때로는 젊은 아가씨가 무슨 천연염색을 하느냐며 내가 만든 제품이 진짜 전통 천연염색 제품인지 의심하던 분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손맛 좋은 아버지와 정직하게 장사하는 어머니의 좋은 점만 닮으려 꿋꿋하게 버텨왔다. 지금도 이조패브릭만의 독창적인 매듭법과 색감을 활용한 천연염색 원단으로 다양한 상품을 개발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대구시 글로벌 명품시장 육성 사업의 일환인 서문시장 야시장에 12:1의 경쟁을 뚫고 내 힘으로 당당히 뽑혀 ‘이조패브릭’이라는 이름으로 천연염색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비록 나는 먼 길을 돌아왔지만, 평생 부모님이 해온 가업을 가족이 함께 이어간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험해도 순리대로 바른 길을 가라”고 하셨던 어머니의 말씀을 되새기며, 30년간 ‘이조’의 이름을 지켜온 부모님을 본받아 이조가 영원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