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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문화/예술/공연

정간물명

월간에세이

게재월

2016년 06월

제목

그리운 아버지의 향기 - 큰 나무가 서 있던 정원 / 김광명, 한양대 명예교수 · 소설가 김동인 아들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들려달라는 원고 청탁을 받고 순간 거절하고 싶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해 보아도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단편적인 몇 가지 기억 속에서도 나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알고 있는 20대, 30대, 40대 때의 아버지 모습은 출판물을 통해 접했거나 몇 장 없는 사진에 남아 있는, 남들도 다 아는 ‘소설가 김동인’의 모습이었지 나만이 알고 있는 ‘우리 아버지’의 모습은 기억에 없었다. 내가 만 일곱 살 때 돌아가셨으니 아버지와의 추억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닐 텐데 왜 이렇게 아버지 모습이 생각이 나지 않을까?

지금까지 많은 아버지를 읽었다. 오만하다는 아버지, 호탕하다는 아버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었다는 아버지, 간결한 문장을 좋아한 아버지, 사진을 좋아한 아버지, 음악가와 화가를 찬미한 아버지, 이랬다는 아버지, 저랬다는 아버지….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그 많은 아버지의 모습들이 내 기억 속 아버지의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부끄럼 많고 수줍어하는 소년이었습니다.” 한때 이렇게 고백했던 소년이 청년이 되어 유산의 힘으로 일본 사람에게 호통치고, “나 김동인 여기 있다”고 글로써 외칠 때 얼마나 통쾌하셨을까?
아버지는 당신의 생각과 생활을 글로 많이 남기신 분이다. 돌아가신 분에 대해서는 다들 좋은 이야기만 하고, 글로만 아버지를 알 수 있는 상황에서 내게 아버지란 거의 신격화된 존재였다. 소년기를 거치면서 나는 그 ‘신의 영역’을 침범하기가 두려워 문학 쪽은 의도적으로 피하면서 살았다. 아버지의 활동 분야였던 문학과는 거리가 먼 의학을 전공한 것도 내가 느낀 아버지의 벽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었다. 내 나이 52세가 되었을 때는 아버지의 수명을 넘어서 살았다는 안도와 죄송함을 같이 느꼈다.

지금도 생각난다. 밤새 원고를 쓰시는 아버지를 우리가 방해하지 못하도록 방 출입을 통제하던 어머니, 자욱한 담배 연기와 방바닥을 뒹구는 원고지들, 두꺼운 백과사전과 책들이 정리 안 된 상태로 쌓여 있던 방,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더 가고 싶었던 방, 많은 시간을 혼자 지내시던 방, 이것이 아버지의 방이었다. 우리가 뭔가 잘못했을 때도 큰소리로 꾸짖는 법이 없었고 기껏해야 “못써”라고 꾸짖는 정도로만 야단치시던 아버지.
내 눈의 눈곱을 혀로 핥아 떼어주시던 분, 뜰에 있는 송충이를 손으로 잡는 법을 가르쳐 주신 분, 들어오시는 기척을 듣고 현관문으로 뛰어간 내게 “나 요술 한다”하시며 군밤을 허리춤에서 바닥으로 떨어뜨리시던 분, 내가 가게에 가서 과자를 사고 뛰어오는 모습을 대문 앞에 서서 빙긋이 웃으며 지켜보시던 분, 아아 그리운 아버지.
담뱃진 때문에 노랗게 변색된 손가락, 그 손으로 내 얼굴을 만질 때 느끼던 야릇한 향기, 이것이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그리운 아버지의 냄새다.

나는 아버님의 사진 몇 장, 어머님에게 낸 친필 엽서 3장, 인지를 찍던 도장 2개, 담배 함, 그동안 출판된 초판 및 전집류 등 극소수의 유품을 오랫동안 보관해왔다. 나이가 들면서 보관의 어려움을 느끼던 중에, 영인문학관 강인숙 관장이 내년에 생길 종로문학관에 맡기라고 적극 권하기에 작년 3월에 모두 보냈다. 막상 보내려니 너무 아쉬워 한 점이라도 간직하고 싶었으나 결국 전부 기증했다. ‘미안해요, 아부지. 아부지가 공인이시니 아들은 추억과 파일로만 아부지를 소유해야 할 것 같아요’라고 마음속으로 인사드리며….
슬하 육 남매 중에 세 명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아실까? 당신의 문학비와 흉상이 어린이대공원에 있고, 당신의 이름을 딴 문학상이 지금도 잘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실까? 당신의 전집이 들어 있는 관 옆에 어머님이 누워 계신 것을 아실까?
나의 딸은 시인이 되었고, 나는 부모님이 살다 돌아가신 집터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경기도 양평군에 와서 인생의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살고 있다. 몇 년 후 다가올 아버지의 탄신 120주년을 잘 준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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