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90년대를 지배했던 한국의 대중가수들에게 빚이 있다. 중학생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 그들의 음악은 나를 가르치고 성장시켰다. 당시 나에겐 어떤 위인이나 유명한 건축가보다도 그들이 필요했다. 대부분 일면식도 없는 그들에게 나는 참 고마운 게 많다.

서태지(형님)에게는 생각의 틀을 깨뜨리는 법을 배웠다. 그가 실제로 틀을 깨뜨렸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자신보다 힘센 꼰대들의 간섭에 굴복해 가사를 바꾸는 대신, 가사를 빼버린 음반을 내놓았던 그가 좋았다.
공일오비(형님들)에게는 실컷 아파야 면역이 생긴다는 것을 배웠다. 그들의 음악 속에 등장하는 어설프고 찌질한 남자는 바로 나였다. 지금 보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가사의 주인공들에게 나는 충분히 감정을 이입했고 함께 아파했다. 하도 앓았던 덕분에 내 심장은 면역력이 생겼다.
이승환(형님)한테는 설레는 법을 배웠다. 설렘의 시작은 행복보다는 슬픔이며, 행복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임을 그는 노래했다. 돌아갈 수 없는 날들이 눈앞에 그림처럼 흩어져도 더 이상 너 때문에 아파하지 않으며, 어느덧 커버린 내 앞에 서 있었던 누군가에게 화려하지 않게 고백할 수 있었다.
김동률(형)은 개인적으로 아는 유일한 가수였다. 같은 대학교에서 같은 전공을 했기 때문이다. 큰 눈을 껌뻑거리며 내뱉는 실없는 농담 뒤에는 깊이 있는 생각이 있었다. 세상의 원칙을 너무 빨리 알아버려 냉소적인 것처럼 보이다가도 사유의 과정에서 나오는 따뜻함이 나를 움직였다.

그리고 신해철(마왕님)이 있었다.
내가 초등학생 때 혜성처럼 등장했던 그는 1990년대에 가수 이상의 존재로 청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실험과 도전이라는 단어를 일상적인 의미로 만들었고, 진지함 너머의 유머가 남자의 가장 큰 미덕임을 증명했다. 근사했던 사운드 위에 펼쳐지는 그의 노랫말과 철학은 걸핏하면 방황했던 내 대학생 시절의 길잡이가 되었다.
그랬던 그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나를 지탱하게 했던 수십 곡의 노래만 남겨둔 채 떠났다. 일개 팬으로서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늘 없었고 지금도 없다. 단지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이 유일한 도리다.
역설적이게도 찬란했거나 고마웠던 기억을 꺼내는 것이 더 어려운 법이다. 고통스러운 현재와 비교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오히려 촌스러웠거나 힘들었던 기억을 아름다웠다고 오해한다. 그때보다 지금이 더 낫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감사한 기억들은 새롭게 재생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기억을 놀이로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몇 달 전부터 가끔 시간이 날 때 하는 혼자만의 놀이가 있다. 유명한 가수의 곡들을 모아 제작한 뮤지컬처럼, 신해철의 음악들로 시나리오를 만들어보는 것이다. 태블릿 PC와 그의 음악이 저장된 스마트폰만 있으면 언제든 즐길 수 있다. 노래와 노래 사이는 내가 상상한 설정으로 채운다.
시나리오는커녕 어떤 짧은 이야기도 써본 적 없는 나에게 이건 혼자만의 놀이일 뿐이다. 스토리는 엉성하고 종종 개연성이 떨어진다. 복수극이나 추리물을 떠올렸다가 스스로 민망해하며, 지금은 어떤 찌질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써보고 있다. 그런 류의 남자 속은 알다가도 모르는 법이니 설득력 있는 스토리가 나올 리 없다. 하지만 실제 극으로 만들어질 것은 아니니 상관은 없다.
어느 정도 틀을 짜고 나면 음악을 시나리오 순서대로 정렬해서 듣는다. 왜 떠나야만 했을까? 왜 거기서 그렇게 바보같이 굴었을까? 왜 그땐 그게 그리도 힘든 일이었을까?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여전히 방황 중이다. 사람은 언젠가 떠나는 법이야. 가슴에 남도록 미안해. 절망의 끝까지 아프도록 떨어지면 희망을 느끼지. 이야기의 순서대로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음악은 주인공을 위로한다.
이야기는 해피엔딩이 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그래도 해피엔딩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한다. 현실에는 없기 때문이다. 해피가 아니라 엔딩이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는 유언처럼 이런 말을 남겼다. 네가 무슨 꿈을 이루는지에 대해서 신은 관심을 두지 않지만 행복한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엄청난 신경을 쓰고 있다고. 이야기는 행복해야만 한다고 결정했다.
신해철은 떠나가 버렸지만 어렸을 때 나를 잡아줬던 음악들은 남아 있다. 나는 그가 남긴 멜로디와 반주와 가사와 노래를 재료 삼아 여전히 만지작거리며 다른 버전의 이야기들을 만들어보곤 한다. 이야기 속 주인공은 여전히 방황하며 해피엔딩을 향해 살고 있다. 영원과 소멸 사이에서 나는 이렇게 노는 중이다.


연세대 건축공학 학사, 스페인 엘리사바 디자인스쿨 석사.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 서울특별시 공공건축가, 현재 오기사디자인 대표. ‘오기사’라는 필명으로 여행작가로도 활동 중. 저서 <오기사 행복을 찾아 바르셀로나로 떠나다>, <깜삐돌리오 언덕에 앉아 그림을 그리다>, <그래도 나는 서울이 좋다>, <인생의 지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