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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문화/예술/공연
정간물명   월간에세이
게재월   2016년 01월
제목  반갑고 고맙고 기쁜 인연들 / 장사익, 가수


마흔을 넘길 때까지 직장을 열다섯 군데 옮겨 다녔다. 좌절하고 넘어지고 깨지느라 인생이 엉망진창이었다. 그때 평소 가졌던 조그만 꿈이 떠올랐다. 태평소 연주자였다.
‘딱 3년만 죽을힘을 다해보자.’ 그런 생각으로 1993년 1월 이광수 사물놀이패를 찾았다.
나는 헐벗은 겨울나무 같았다. 나무는 겨울이 되면 옷을 모두 벗는다. 그렇게 비웠다가 봄이 되면 다시 자신을 채운다. 사람의 일도 자연의 이치와 다를 바 없다. 내가 먼저 비우려는 마음을 먹었기에 소중한 인연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뒤늦게 노래하는 삶을 살 수 있는 큰 행운이 오지 않았나 싶다.
내가 가수의 길로 들어서게끔 등을 떠민 첫 번째 인연은 피아니스트 임동창이다. 이광수 사물놀이패에 합류한 지 2년째 되던 해, 이광수와 김덕수 사물놀이패가 함께 공연한 날 뒤풀이 자리에서 만난 친구였다. 당시 김덕수 사물놀이패에 있던 임동창은 내가 뒤풀이 자리에서 부르는 ‘대전 부르스’를 듣고 ‘저 형이 세상에 나오면 재미있겠네’ 생각했던 모양이다. 1994년 8월 어느 날 밤, 그 친구가 찾아와 공연을 하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마흔여섯에 노래는 무슨…”하며 손사래를 치다가 “그래, 미친 척하고 딱 한 번만 해보자”고 얼떨결에 떠밀려 나온 게 그해 11월의 데뷔 공연이었다. 100석짜리 무대를 이틀간 빌려 공연했는데, 입소문을 타고 찾아온 관람객이 각각 400명씩, 800명을 훌쩍 넘겼다.

노래를 하게끔 나를 세상에 떠밀어준 친구가 임동창이었다면, 남들이 부르지 않는 독특한 색깔을 담은 노래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게 이끌어준 분은 타악 연주가 김대환 선생이었다. 선생은 사물놀이 공연이 끝나고 나면 으레 열리던 뒤풀이 자리에서 내 노래를 청해 듣곤 하셨는데, 하루는 “박자 맞추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불러 봐”하셨다. 다시 불러봤지만 “아니야, 속으로 박자 세고 있잖아”하고 꾸짖으셨다.
그때부터 나는 노래에서 박자를 해체해버리고 자연을 닮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실제로 자연의 변화를 지켜보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박자를 딱딱 맞춰 찾아오는 법이 없다. 봄이 빨리 오기도 하고, 여름이 늦게 오기도 하고, 때론 겨울이 가을 같기도 하면서 그때그때 호흡이 다르지 않던가. 그렇게 자연스럽게 자연을 닮은 호흡으로 노래하니, 처음에는 ‘저게 뭔가’하던 사람들도 세월이 흐르면서 편하게 내 노래를 들어주었다.
1994년 데뷔 공연 이후 갑작스럽게 얻은 세상의 주목에 들떠 자만했다면 자칫 헛바람이 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때 김대환 선생이 들려주신 말씀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야, 인기 끌지 마.” 인기에 연연하게 되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방향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고, 그럼 색깔을 잃고 추락할 수밖에 없다. 선생은 일찌감치 그걸 간파했다. 그러고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라고, 똑같은 길을 가면 ‘이미테이션’에 불과하다고 조언했다. 임동창이 내게 ‘이 길을 가보라’고 권한 친구였다면, ‘이 길을 어떻게 가야 하는가’를 알려주신 분은 김대환 선생이셨다.

1994년 데뷔해 햇수로 22년째 노래를 부르며 살아오면서 두 분 외에도 고마운 인연들이 많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도 그 수많은 인연 덕분이기에, 나는 작은 인연도 소중하게 여긴다. 마흔여섯 적잖은 나이에 노래를 시작하게 된 것도 그 인연이 쌓이고 겹쳐 일어난 기적이 아니겠는가. 먼 과거로 돌아가 보면 부모님이 서로 사랑해서 내가 태어났으니 그 인연이 반갑고, 성장한 후에 내게 힘이 되고 길을 열어준 친구들이 고맙고, 노래하며 살 수 있는 내 인생이 기쁘다. 하다못해 내게 못되게 군 친구들이나, 힘겨웠던 시절까지도 고맙다. 인생살이가 내 노래의 텃밭인데, 굽이굽이 굴곡진 인생을 살면서 느낀 희로애락이 없다면 들려줄 이야기도 없지 않겠나. 사람들이 “맞아, 나도 인생이 힘들고 어려웠는데 저렇게 내 이야기를 하네”하고 공감할 때 우리는 무대에서 서로 소통할 수 있고, 내 노래에도 생명력이 생긴다.
거실에 앉아 뜰을 내다본다. 어머니 손등처럼 거친 감나무 둥치에서 자라난 감들이 가지 끝에 매달려 겨울을 나고 있다. 감나무는 잎사귀가 파랄 때까지는 가지에 영양을 주지만 단풍이 들면 영양을 끊어버린다. 마른 가지 끝에 매달린 감은 가을볕과 겨울 서리를 이기며 살아남아 단맛을 낸다. 문득 감나무도 내 인생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노래를 시작할 때는 소중한 인연들이 끌어주고 길을 가르쳐주었지만, 그들이 떠난 뒤에는 스스로 끊임없이 배우며 이 길을 걸어오지 않았던가. 혹독한 시절을 이기고 홀로 익어가면서 깊은 단맛을 내는 감처럼, 앞으로도 겹겹이 쌓여갈 인연에서 우러난 인생의 맛을 담은 노래를 부르고 싶다.





           [출처] 월간에세이 (20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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