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인생이 제 뜻과 무관하게 흘러가는 것을 알게 된다. 독신을 고집하던 내가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무자식 상팔자주의’였다가 아이 둘을 낳으면서 세 사람씩이나 내 인생 안으로 끌어들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또 그중 한 사람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내 인생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고 말았다. 이후로 나는 인생에는 ‘사람의 몫’과 ‘나머지 부분’이 있어서, 사람 소관 밖의 나머지는 하늘이 주관하는 운명이라 이해하고 있다.

남편을 떠나보낸 후의 상실감, 그 공허와 적막감을 받아들이고 감당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반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무기력하게 앉아 있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그럴 때마다 엄마를 쳐다보는 아이들의 눈빛은 불안하게 흔들렸다. “엄마 왜 그러세요?”라고 묻는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잔뜩 묻어났다. 어느 날 남편을 보낸 아내의 처지에 절망할 게 아니라 아빠를 잃은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자, 침울한 집안 분위기를 어떻게든 바꿔보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아이들과 함께한 책읽기였다.

그때는 툭하면 쏟아지는 것이 눈물과 한숨뿐이어서 되도록 감정을 자극하지 않는 책을 읽고 마음을 다잡고 싶었다. 아이들 앞에서 굳센 엄마의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옛사람들이 글공부를 배울 때 제일 먼저 시작했다는 ‘천자문’이다. 소설가 김성동의 <김성동 천자문>(청년사)은 우리 집에 오랫동안 둥지를 튼 책이지만 주인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하지만 읽다 보니 저자의 개성적인 천자문 뜻풀이와 그에 얽힌 에피소드를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세 사람이 무릎을 꿇고 앉아 ‘하늘 천 따 지’하며 음의 장단과 고저에 맞춰 읽다 보면 제법 서당 분위기가 났다. 뜻풀이를 되새기고 저자가 풀어놓은 개인과 역사, 사회, 정치 등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위축된 마음이 서서히 풀리면서 내 앞의 닫힌 세상이 조금씩 열리는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쑥스러워하던 아이들도 재미를 붙이면서 저녁 식사가 끝나면 은근히 천자문 읽는 시간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천자문을 읽으면서 나는 남편이 와병 중에 출간한 <어느 인문주의자의 과학책 읽기>(연암서가)에 실린 박정만의 ‘종시(終詩)’를 대면하면서 <김성동 천자문>이 유독 내 눈길을 끌었던 이유를 짐작하게 됐다. 김성동은 무시무종(無始無終)의 광활한 우주의 단상에 박정만의 종명시(終命詩)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를 포개놓았는데, 남편은 ‘재생’ 이미지에다 이 시를 길어 올렸던 것이다.

남편의 책을 읽을 때는 남편이 자신의 운명을 내다보고 한 말 같아 마음이 무거웠는데, 천자문에서 그 시를 다시 만났을 때는 남편의 육성을 듣는 듯해 반가웠다. 석 달 동안 천자문을 읽으면서 우리 가족은 뭔가 특별한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천자문을 읽어갈수록 집안에는 조금씩 생기가 도는 듯했고, 가족끼리의 결속력도 강해지는 듯했다. 어려운 시기에 가족끼리 한 자리에 앉아 책을 읽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작업이지 싶다. 때로는 내용보다 형식적인 의식이 중요할 때가 있는 법이다.

감정을 노출시키지 않으려 해도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입장이고 보면 결국은 상실과 소멸을 다루는 이야기에 눈과 귀가 열리기 마련이다. 재클린 윌슨의 <미라가 된 고양이>(시공주니어)는 엄마 잃은 아이의 상실감을 다룬 동화다. 이 동화는 어린 나이에 상실감을 제대로 치유하지 않으면 죽음과 사체 집착증을 보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아이들과 이 동화를 읽고, 책에 나오는 것처럼 떠나버린 이를 위한 <사자(死者)의 서(書)>는 아니더라도, 편지 쓰기를 하면서 아이들의 마음에 자리 잡은 울분을 조금은 달랠 수 있었다. 아빠라는 단어가 금기어가 되다시피 한 집안 분위기에서 아빠에게 편지를 쓰라는 것이 좀 잔인해 보이기는 했지만 꼭꼭 숨긴 감정을 건드려주는 것이 중요해 보였다.

처음에는 못 쓰겠다고 버티던 아이들도 코를 훌쩍이며 쓰고 나서는 표정이 더 나아보였다.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작은 아이는 “아빠, 잘 지내고 있죠?”로 글의 서두를 썼고,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큰아이는 “아빠, 우리 찾아올 때는 바람으로라도 와야 해. 아빠 꼭 한 번만 와, 응?” 하고 편지를 맺었다. 책이 아빠를 불러낸 셈이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나자 집안을 가득 채운 장서가 고민거리였지만, 지금은 남편의 손때 묻은 책들이 가족 곁에 있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사람은 떠났지만 책은 남아 이렇게 떠난 사람의 빈자리를 채워간다. 그는 갔으나, 나와 아이들은 책의 숲에서 뒹굴며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그가 여기 존재함을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