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적부터 다른 것보다 그림 그리기를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는 사생대회에 나가서 상도 받게 되었는데, 그때 선생님들의 칭찬을 받으면서 주위에서도 인정을 해주니 마냥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특히 다른 친구들은 잘 쓰지 않는 색감을 가지고 있다고 칭찬하실 때면 스스로도 무척 신기했던 것 같다. 그렇게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그림은 나의 취미이자 특기, 친구이자 꿈이 되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6학년 때 신체검사를 받으면서 내가 ‘색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동안 왜 남들이 쓰지 않던 것과 다른 색을 써왔는지 알게 되면서 서서히 그림과 멀어졌다. 당시 담임선생님께서도 여러 사람 앞에서 몇 번이고 심각하게 색약검사를 했었다. 전교생이 얼마 되지 않았던 시골 학교에서 유일하게 나만 색약이 나왔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나는 ‘내가 비정상인가?’하고 창피하면서도 겁이 나기도 했다.

 그렇게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스스로 뭐가 되고 싶은지, 뭐를 가장 잘하고, 앞으로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그저 남들처럼 통과의례를 치르듯 대학에 들어갔다. 물론 마음속으로 막연하게나마 ‘디자인’을 하고 싶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색약은 디자인과에 지원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바로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팔자에도 없던 영어를 전공하게 됐고, 공부는 뒷전이고 대학의 낭만(?)만 만끽했었다.

 시간이 흘러 또 자연스레 군대를 제대했고, 얼마 후 학교까지 졸업하면서 다시 고민에 빠졌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고 살아가야할까?” 하는 고민에 복잡해진 마음으로 별다른 결론 없이 커피숍에서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디자인’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었던 것일까. 우연히 동네에 있는 직업전문학교(지금의 폴리텍대학)의 모집공고를 봤고, 이후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멀티미디어 디자인학과’에 새롭게 지원했다. 하지만 역시나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다시 색약 검사를 통과하지 못해서 1차 탈락이 된 것이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나를 비켜가진 않았다. 워낙 시골에 있는 학교다보니 정원 미달로 운 좋게(?) 꿈에 그리던 디자인 전공을 늦은 나이에 다시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나의 디자인 인생은 시작됐다. 거의 매일 밤을 새워가며 홈페이지 제작, 컴퓨터로 그림 그리기를 꾸준히 하면서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여전히 색약이라는 약점을 갖고 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디지털 디자인 특성상 색을 차트와 코드로 입력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차트의 위치와 색의 코드 값을 외우며 색을 구분하게 되었다. 물론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선뜻 잘할 용기는 없다. 하지만 그때는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게 너무 재미있고 보람 있었다.

 그렇게 직업전문학교에서 6개월 과정을 수료한 뒤 나름대로 ‘컴퓨터 그래픽스 운용기능사’를 취득했고, 이후 직장을 갖게 됐다. 먼저 지방에 있는 작은 웹 에이전시에서 처음 웹디자인을 시작했고, 좀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어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꿈을 향한 행보를 하던 중 몇 군데의 디자인 회사를 거쳤다. 그러다 ‘영상’이라는 전혀 다른 매체에 관심이 생겼고,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델픽’이라는 작은 디자인스튜디오를 열어서 운영하고 있다.

 델픽 디자인 스튜디오에서는 상업적인 프로젝트와 더불어 뮤직비디오 등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을 통한 비상업적인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는데, 매번 새롭고 긴장된다. 간절히 원했던 디자인, 그래서 나를 뛰어넘고자 도전했던 디자인. 과거의 꿈이 현실이 됐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더 큰 꿈이 됐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하다. 색약이라는 한계가 있었기에 더 간절하게 나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스스로 안 된다고 포기해 버린다면 누구도 내 길을 열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여전히 멀고도 멀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전진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들이 흔히 말하는 성공을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 그런 기회를 얻었다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 단지 하나의 욕심, 아니 바람이 있다면 함께 꿈을 만들어가고 있는 좋은 사람들과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행복했으면 하는 것이다. 그게 진정한 성공, 소박한 꿈이 아닐까? 너와 내가 ‘함께’ 발걸음을 맞춰나가는 것이야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