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만난 첫 날, 그녀의 이름과 번호를 받아 적으면서 그는 펜을 고장 냈다.

 그녀는 “넌 다 고장 내는구나?” 장난스레 말하며 무언가 지금 이 순간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의 복선이 되겠구나, 어렴풋이 느꼈다.
그들은 많은 것이 달랐다. 자라온 환경도, 언어도, 피부색도,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그녀가 사는 곳과 반대되는 지구 건너편에 살고 있었다. 잠시 들른 한국에서 그는 그녀를 만나게 되었고, 서울이라는 도시를 걸으며 그들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의 주제는 어린 시절 추억부터 10년 후 계획까지, 그날 먹은 아침식사부터 자기 전 들은 음악까지, 끝이 없었다.
그녀는 질문을 많이 했다. 그가 사는 나라의 날씨라든지, 그가 만든 영상의 숨겨둔 비밀이라든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라든지, 그녀는 그가 신기하고 궁금했다.

그녀는 외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여러 나라와 문화와 인종이 뒤섞인 곳에서 자라면서 자신과 다른 색의 눈과 피부를 가진 친구들이 많았다. 어린 마음에 파란 눈의 아이를 짝사랑하기도 하고, 파티에서 느린 노래에 맞춰 그와 춤도 췄었다. 외국친구들과 잘 맞았고 그들과 친구가 되는 것이 아주 익숙한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갈색 눈의 그에게 느끼는 설렘은 낯설었다. 외국인에게 반하게 될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이 아닌 내가 사는 이곳에 잠시 들른 이 낯선 이에게 마음이 두근거리는 것이 겁났다.

그는 어린 시절 화상을 입어 오른쪽 팔에 커다란 흉터가 있었다. 어릴 적 흉측하다는 생각에 한 여름에도 긴 소매 옷을 입고 다녔다고 했다. 지금은 자신의 일부라고 생각하며 아무렇지 않게 보이고 다닌다고 어깨를 으쓱하는 그를 보며 그녀는 아름답다, 조용히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그가 첫날 고장 내버린 펜을 들어 그 흉터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의 팔에서 정원을 보았다. 흉측해 보이는 모양들이 그녀에게는 활짝 만개한 꽃으로 보였다. 그렇게 서툰 그림 솜씨로 꽃을 잔뜩 그린 후,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어느 유행가의 가사를 적었다. ‘show me a garden that’s bursting in to life.’ 고마워, 그는 그녀의 작품을 한참 바라본 후 말했다.

그들이 함께한 시간은 일주일도 안 되는 짧은 며칠이었다. 언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날 정도로 그 시간 속에 꽉 찬 밀도 있는 순간들을 보냈다. 비오는 광화문 밤거리를 걸으며 영화를 이야기했고,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젊은이들의 불안한 미래를 걱정했다. 가장 뜨겁다는 클럽을 찾아 내일이 없는 듯이 춤을 추었고, 어느 날은 당연하다는 듯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가 떠나야 할 날이 왔다. 그녀는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지는 나그네를 사랑하면 안 되는 것을 알기에 어느 정도 마음의 벽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함께 공항으로 가는 길에 그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고 그저 그런 일상을 이야기했다. 마치 다시 돌아올 듯한 사람처럼, 이곳이 고향인 사람처럼. 그렇게 이별이 아닌 듯 그녀를 대하고 있었다.
소중하게 대해줘, 그녀가 말했다. 응?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고, 만난다고 하더라도 미래를 나눌 수는 없겠지. 그래도 우리가 같이 한 이 순간들은 영원히 소중하게 대해줘.

그는 숨을 들이 마시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말을 꺼냈다. 나는 이곳에서 너와의 미래가 상상이 되고, 이곳에서 만난 친구들과의 생활도 상상할 수 있어.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 하겠지. 소중해. 지금 이 순간까지 굉장히 소중해. 영원히 그럴 거야. 그녀는 그의 눈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진심이라는 것을 확신하고서야 눈을 돌렸다. 이것으로 됐어,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 입맞춤을 나눈 후, 공항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혼잣말을 했다. 봐, 넌 다 고장내는구나.




*1980년 출생. 고려대학교 중어중문학 학사. 그룹 ‘티티마’ 멤버로 데뷔. 영화 <조류인간><오하이오 삿포로>(주연), <검지손가락>(주연·연출). 저서로는 <아무도 몰라><꿈, 틀>. 현재 인디밴드 ‘하즈베리필드’(보컬·기타)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