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켜켜이 나있는 그 틈에 소리가 새겨져 있다니, 그 틈에 바늘을 놓으면 다른 소리들을 내다니…. 그 시절 턴테이블은 또래 아이들은 몰랐던, 나만의 보물 상자와 같았다.”

오늘 지인에게서 LP 디스크를 선물 받았다. 여태껏 내가 봐온 두꺼운 검은색 LP가 아니라 설탕물을 맑게 녹여낸 듯이 신비로운 투명판이었다. 지인은 이 투명 LP보다 검은색이 소리가 조금 더 좋다는 귀띔도 해줬지만, 처음 보는 이 예쁜 물건은 소리까지 가지 않더라도 보기만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은 집에 턴테이블도 이젠 없는데 왜 내 마음이 이토록 설렐까.

징, 징, 징기스칸~. 듣기만 해도 호기로워지던 저 노래는 1979년 잠실 개발과 함께 성냥갑처럼 지어진 콘크리트 아파트의 삭막함과 함께 떠오른다. 당시 큰오빠가 다니던 회사에서 나온 턴테이블 세트. 그 세트에 데모 LP로 들어있던 것이 저 징기스칸송이었는데, 나는 갓 이사 간 높고 낯선 그곳에서의 허기를 달래려는 듯 그 전축 세트에 집착했다. 유치원도 다니지 않았기에 일곱 살 소녀의 유일한 장난감이었던 그 전축에 공테이프 하나를 구해 녹음을 몇백 번은 반복한 것 같다.

어느 날 아버지가 퇴근길에 들고 오신 차이콥스키는 어린 나에게는 거의 수면제 수준이었고, 이듬해 오빠가 판을 냈다고 가져다준 <조동진 1집>이 제대로 된 리스닝의 시작이었다. 가죽 잠바를 입은 장발의 말 없는 청년, 조동진. 내 기억 속 오빠는 늘 그랬다. 이야기를 듣는 편이었고, 좀처럼 감정의 기복도 보이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노래를 참 많이 닮아있었다.

몸이 불편하다는 소식에 덜컹했지만,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날 줄은 몰랐기에 그 시절의 추억과 노래가 더욱 그리워진다. 긴긴 다리 위에 저녁 해가 걸릴 때면, ‘내가 좋아하는 너는 언제나’, ‘바람 부는 길’을 온종일 듣다 보면 며칠만 지나도 바늘 끝에 먼지가 쓸려 붙어있고, 그걸 조심스럽게 제거하는 것이 나만의 쾌감이었다.

켜켜이 나 있는 그 틈에 소리가 새겨져 있다니, 그 틈에 바늘을 놓으면 다른 소리들을 내다니…. 그 시절 턴테이블은 또래 아이들은 몰랐던, 나만의 보물 상자와 같았다. 오늘 이 LP판을 들고는 문득, 그 시절의 투박한 질감이 떠올랐다. 아니, 너무나 그리워졌다. 잊었던 첫사랑을 생각하듯 설레고 미소를 짓는다.

주변 전문가들에게 턴테이블을 추천해달라고 하니 의견이 분분하다. 그냥 책상에 올려놓고 편하게 들으라며 추천해준 10만 원대부터, 그럴 바엔 아예 사지 말고 나중에 그럴듯한 좋은 사운드를 내는 것으로 사라고 만류하는 사람들까지. 수천만 원 하는 진공관 앰프, 500만 원대의 도금 케이블, 200만 원대의 6구 멀티탭….

소리의 세계에 빠지면 끝도 없다는데 가끔 나는 그립다. 밤늦도록 흑백 TV에 꽂아 몰래 듣던 모노 레시바, 전파가 좋지 않아 쇠젓가락을 걸쳐놓고 겨우 듣던 라디오 소리, 하도 많이 들어 냉동실 행이 단골이던 늘어진 테이프까지. 그 모든 내 기억의 로우 엔드들. 이 시대 우리가 레트로 코드에서 찾고 싶은 것은 어쩌면 그 기억의 질감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