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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문화/예술/공연
정간물명   월간에세이
게재월   2016년 04월
제목  휠체어 위의 웃음 - 만남 / 오준, UN 한국 대사


싱가포르 장애인협회 회장인 치아 용용(Chia Yong-Yong) 변호사를 친구들은 ‘용용’이라고 부른다. 늘 웃는 얼굴의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싱가포르 주재 대사로 부임한지 얼마 안 된 2010년 여름경이었다. 아시아에서는 어디서나 한국 대중문화의 인기가 높기 때문에 대사관에서는 문화 행사를 자주 개최했는데, 휠체어를 타고 참석한 용용이 눈에 띄었다. 악수를 하려 했더니 용용은 팔을 조금 움직였다. 손을 들 수 없기 때문에 팔을 움직여 악수에 응하려 한다는 걸 눈치 채고, 무릎 위에 놓인 그녀의 손을 내 손으로 감싸 쥐는 식으로 악수했다. 용용은 그런 나를 올려보며 정말 반가운 듯한 웃음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그때부터 싱가포르에 있는 3년 동안 한 달에 한두 번은 용용을 만났고, 그 후에도 한국이나 뉴욕에서 만남이 이어졌다. 우리 부부와 식사도 자주 했는데, 긴 대화를 나누면서 그녀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용용은 어릴 때부터 쉽게 넘어지곤 하다가 15살 때 선천적 유전자 질환인 비골근 위축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진행성 장애여서 처음에는 목발을 짚는 정도였지만 대학에 갈 때쯤에는 휠체어를 타야 했다. 용용의 여동생 레슬리도 같은 장애가 있다.
저녁식사나 행사에 올 때는 함께 참석한 동료가 도와줄 때도 있지만, 대개 용용의 아버지나 집에서 일하는 도우미가 따라온다. 그녀의 아버지는 원래 건설 공사 일을 하다가 용용이 법대에 진학하면서 언제든지 차를 태워주기 위해 아예 택시 기사로 전업했다. 이제 70대 중반이 되었지만 아직도 용용 자매의 손발이 되어 어디든 따라다니신다. 나는 용용의 부모님과도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자신들이 죽으면 누가 딸들을 돌볼지 늘 걱정이셨다. 용용은 성공한 변호사이고 동생도 직업이 있으니 보조인의 도움을 받아 충분히 잘 살아가겠지만, 부모 된 입장에서는 쉰 살이 넘어서까지 혼자 사는 딸들이 늘 안타까우셨던 것 같다.

용용은 내가 초청하면 어떤 자리든 반드시 참석하였다. 꼭 한 번 해외여행으로 못 온 적이 있는데, 그때도 여행 계획을 어떻게든 바꿔보려고 하다가 안 되었다. 용용은 항상 행사의 성격에 맞는 옷차림과 화장을 하고 온다. 식사 때도 캐주얼한 자리에서는 보조인이 먹여주기도 하지만, 정식 만찬 때는 포크를 움켜쥐고 어떻게든 입으로 가져가려 애썼다. 액체로 된 음식은 빨대를 써서 먹었다.한국 드라마, 영화, 음식 등 한국과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지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자리에는 반드시 용용을 초청했다. 내가 싱가포르 대사를 마치고 UN 대사로 옮기기 전 3개월간 서울에 있을 때는 가족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일행 모두를 싱가포르인들이 좋아하는 제주도 흑돼지 전문점에 데려갔는데 좋아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한국의 시각장애 피아니스트 유예은 양이 싱가포르에 왔을 때는 용용과 함께 공연을 보고 소개도 시켜주었다. 우리 대사관이 한국 영화 축제를 개최하였을 때 용용은 영화 <맨발의 기봉이>를 내 옆자리에 앉아 보기도 했다. 그때 나는 용용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눈치 챘다. 그 모습을 보면서 항상 웃는 얼굴인 용용도 실은 눈물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꿈 많은 소녀 시절에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미 흘릴 수 있는 눈물을 다 흘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어렵게 변호사 공부를 했는지, 계단이 많은 싱가포르 국립대를 어떻게 다녔는지, 갑자기 손발이 움츠러드는 고통이 올 때 어떻게 하는지 들려줄 때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하듯 밝은 모습이었다. 삶에 대한 그녀의 긍정적인 태도와 조용하면서도 적극적인 자세는, 나태하게 살기 쉬운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만든다.

나는 15년 전 어머니가 파킨슨병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마지막 3년을 휠체어에서 보낼 때,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살면서 장애인의 권익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한 단계에서는 장애인으로 살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UN 대사로 온 후에는 2015~2016년 임기의 장애인권리협약 의장을 맡았다. 장애인 복지에 관한 일을, 개인적인 관심을 넘어 대사 업무의 일부로 다루게 된 것이다. 용용도 2014년부터 싱가포르의 임명직 국회의원(비례대표와 비슷한 제도)이 되어서, UN에서 열린 2015년 장애인 협약 당사국 총회에 싱가포르 정부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용용은 이제 한국어도 배워서 간단한 말을 하고, 업무상 뿐 아니라 휴가로도 한국에 자주 간다. 한 달 전에 보내온 이메일에는 우리말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썼다. 그리고 한국에는 좋은 게 너무 많지만, 가장 최근에 좋아하게 된 것은 고개를 숙여서 인사하는 문화라고 했다. 나는 용용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기 때문에 이유를 물어보지 않았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악수를 하려 하자, 어깨를 움직이면서 손이 꼼짝하지 않는 것을 마치 재미있지 않느냐는 듯이 활짝 웃던 모습이 다시 떠오른다.

약력 | 외교부 다자외교조정관, 싱가포르 주재 대사를 거쳐 2013년부터 UN 주재 한국 대표부 대사로 근무 중. 현재 UN 경제사회이사회 의장 및 장애인권리협약 의장. 2014년 12월 영산외교인상 수상.





           [출처] 월간에세이 (20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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