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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문화/예술/공연
정간물명   월간에세이
게재월   2016년 03월
제목  정겨운 이 세상 - 만남 / 황병기, 국악인


사람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말인 것 같다. 닭, 개, 말, 소에서부터 모기, 빈대, 벼룩에 이르기까지 모든 동물 세계에는 말이 없다. 봄이 되어 만물이 생겨나고 여름과 가을을 지나 겨울이 되어도 자연 세계에는 말이 없다. 그래서 공자는 “하늘이 언제 말씀을 하시더냐?”고 했다.
사실 신의 세계에는 말이 없고 말이 필요치도 않은 것 같다.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신과 소통하려고 하지만, 이 모든 노력이 허사로 보인다. 사실 ‘신’이라는 것부터가 사람이 지어낸 말이지 않은가. 사람이 스스로 신에게 말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생각해낸 것이 기도이지만, 모든 기도에 대해 신은 속 시원하게 말씀으로 대답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일생을 말하면서 살지만, 종교적으로 보면 그 말 때문에 계속 죄를 지으며 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성당 미사의 첫 순서인 ‘참회’에서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제 탓이오,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라면서 자신의 가슴을 치는 것이다. 이러한 천주교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짓는 죄는, 불교의 의업(意業), 구업(口業), 신업(身業)의 삼업(三業)과 흡사하다. 한국 불교에서 가장 애호되는 천수경의 첫 구가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 즉 입으로 지은 죄를 깨끗이 하는 진언이니, 삼업 중에서도 특히 입으로 짓는 업을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알 수 있다.
지난 연말에 아현동 성당 보좌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받았다. 그는 아직 젊지만 맑고 신중하면서도 다정해 보였다. 그도 사람이 신과 말할 수 없음을 시인했다. 하지만 신을 체험할 수는 있는데 그것을 말로 증명할 수는 없다는 성직자다운 말을 했다. 그러나 그는 성직자로서는 색다르고 놀라운 말도 했다. 사람이 정이 많으면 죄도 많이 짓게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말이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두 손으로 나의 머리를 한참 동안 감싸 안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공자는 “나는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신을 섬기겠느냐”고 했다. 또 “나는 삶도 잘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고도 말씀했다. 인간 세계에는 죄도 많지만 정도 많다. 인간 세계의 최대 매력은 사람들 간의 따뜻하고 푸근한 정이다. 아무리 신심이 깊고 영생을 갈망하는 사람이라도 이 정다운 세상을 어찌 저버리고 다른 세상에 갈 수 있단 말인가.

우리 집에서 가사를 돕는 초로의 아주머니는 다정한 분인데 말이 유달리 많고 목소리도 커서 집안이 떠들썩하다. 어린 시절의 시골 생활과 중매결혼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부터 요즘 생활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다 들려준다. 현재 어느 아파트 수위로 있는 남편이 나이가 들어 퇴직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서 더 근무하게 되었는지도 설명해준다. 자기는 현재 아주 행복하다고, 일생을 돌이켜 보니 지금이 가장 행복한 것 같다고 웃는다. 자기가 돈을 안 벌어도 먹고 살 수는 있지만, 노후를 생각해서 일을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그녀는 얼마 전에 첫 손자를 보았는데 백일이라고 백설기 돌떡을 돌렸다. 그녀는 스마트폰을 애용하는데 우리가 궁금해하는 것을 곧잘 검색해서 알려주기도 한다. 첫 손자가 태어났을 때의 늠름한 모습을 우리 식구들은 다 아주머니의 스마트폰으로 보아서 알고 있는데, 요즘은 그 애가 처음으로 몸을 뒤집는 동영상을 보여 주었다. 몇 번이고 시도하다가 처음으로 뒤집는 데 성공하자 아이 곁에 둘러앉은 아빠와 엄마가 박수치며 환호하는 동영상이었다. 그 애와 아무 관계가 없어도, 그 동영상을 보는 이들은 누구나 다 흐뭇해하고 기뻐한다. 참 인간 세상이란 정겹고 따뜻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더 좋은 하늘나라가 있더라도, 이 세상을 되도록 떠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요즈음 뉴스를 보면 우리 사회에는 참으로 끔찍한 일이 많이 일어난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은 부모를 죽이고, 선생이 제자를 학대하고 재자가 선생을 때리고, 남편을 살해해 달라고 남편 친구에게 살인청부를 한다. 한편 자살률은 나날이 늘어난다. 이 세상이 정겹지 않게 느낄 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본래 세상은 자연스럽게 정겨운 것이었다. 그러나 고도의 경제 성장을 최고의 우선 과제로 삼으면서 본래의 정겨운 사회가 경쟁 위주의 살벌한 사회로 변질되고 만 것이다.
몸을 뒤집기만 해도 박수와 축복을 받는 아이라도 성장하여 학교에 들어가면, 경쟁에 이기기 위하여 과도한 사교육비를 들여 밤늦게까지 학원에서 공부하고 낮에는 학교에서 피곤하여 꾸벅거리는 생활이 시작될 것이다. 간혹 모든 것이 뒤틀려 버리면 이 살벌한 세상을 떠나기 위하여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자연성을 존중하여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겨운 이 세상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문화재전문위원·이화여대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겸임교수·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역임. 현재 이화여대 명예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백남준문화재단 이사장.





           [출처] 월간에세이 (20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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