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에 발 디딘 지 적잖은 세월이 흘렀다. 말과 글, 언어생활과 본격적인 첫 인연을 맺은 건 아나운서로서지만, 내게 화법과 글쓰기를 배우는 학생들은 나를 교수님이라 부른다. 졸문 엮어 책 몇 권 낸 덕에 출판사에서는 저자로 대접한다. 방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연출하는 PD 노릇도 했다. 그리고 2011년 사진전을 하면서 생긴 또 다른 직함이 작가이다. 최근에는 작가라는 말의 앞머리에 그럴듯한 수식어가 덧붙어 ‘문자 작가’로도 불린다. 지난봄 훈민정음을 바탕으로 펼친 <텍스토그램(TexToGram)> 개인전 이후의 일이다.
< 텍스토그램>은 ‘Text to gram’, 곧 문자(text)의 글꼴을 추상 이미지로 형상화(gram)한 작업이다. 누구는 ‘텍스토그램의 창시자’로 추어올리지만, 시작은 ‘같은 뜻이어도 문자가 다르면 그에 따라 기(氣)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에서 출발했다. ‘국지어음(國之語音) 이호중국(異乎中國) 여문자불상유통(與文字不相流通)…’과 ‘

나랏말ᄊᆞ미듀ᇰ귁에달아문ᄍᆞᆼ와로서르ᄉᆞᄆᆞᆺ디아니ᄒᆞᆯᄊᆡ…’,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가 서로 맞지 아니할세…’의 텍스트를 겹친 문자별 이미지는 과연 달랐다. 한문은 두리뭉실하게 퍼졌고, 훈민정음은 반듯하게 뭉쳤으며, 현대 한글은 동글동글하게 맺혔다. 다큐멘터리 작업하듯 하나씩 글꼴을 겹친 형상은 사뭇 다른 추상 작품이 되었다. 말의 기운은 글에 담기고 글을 추상화한 형상에도 고스란히 옮겨간다. 말과, 글꼴의 형상을 담아낸 텍스토그램은 그래서 하나이다. 텍스토그램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니 아나운서로 첫발을 내디딘 때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운명입니다.” 이 한마디로 나는 아나운서가 되었다. 월터 크롱카이트 같은 앵커가 되겠다, 바버라 월터스처럼 최고의 여성 방송인이 되겠다, 스포츠 캐스터로 인정받겠다…. 여느 응시자들의 당찬 포부를 여러 차례 들었기 때문일까, 사장은 말없이 그저 웃기만 했다. 웃음을 뒤로하고 최종 면접장을 나서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묵묵부답과 웃음은 어떤 의미일까. 답은 두어 시간 뒤 알 수 있었다. MBC 정오 뉴스에 ‘최종 합격자, 아나운서 강재형’이 자막과 함께 발표되었으니까.
돌이켜보니 운명이었다. 말과 글을 유별나게 대했던 어린 시절, 혼자 있는 시간이면 엄마가 공책에 써 주신 낱말을 하나씩 베껴 쓰며 한글을 익혔다. 어느 날 엄마에게 물었다. “‘무우’는 왜 ‘무’가 아니라 ‘무우’라고 써요?” ‘무우’가 표준어였던 때의 일이다. 엄마가 어떻게 설명하셨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말하는 것과 표기하는 것이 같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자연발화와 규범표기의 차이를 미취학 아동 때 궁금해 했으니, 말하기를 업으로 삼는 운명은 떡잎부터 드러났던 것 아닌가.
아나운서의 일은 재밌었다. 시보와 에스비 스폿(SB spot: 한 프로그램이 끝나고 다음 프로그램이 시작될 때까지의 짧은 시간에 방송국명, 호출 부호 따위를 알려 주는 일) 생방송, 리포터로 취재 현장을 누비는 일은 시·청취자일 때는 몰랐던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아나운서의 업무는 카메라와 마이크 앞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었다. 아나운서실은 방송(언어) 교육의 현장이기도 했다. “큐(cue) 들어오기 직전엔 입을 살짝 벌리고 있어라(입술 떼는 소리가 잡음이 될 수 있으므로)”, “방송 전에는 탄산음료, 단것은 먹지 말아라(탄산가스 탓에 트림이 나고, 입안에 침이 고이면 발음이 부정확해지므로)”, “중계방송 현장에 도착하면 가까운 화장실 위치를 먼저 확인하라(특히 하프타임이 없는 야구, 배구 등)”…. 선배들이 무심한 듯 툭툭 던져주는 발음과 호흡법, 방송 때 주의해야 할 점 등의 조언은 다시 후배에게로 이어졌다.

‘아나운서는 표준어 교사’라는 말이 있다. 새내기 시절 이 명제가 직업의 자부심이 되었지만, 마음 한쪽에는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바람직한 방송 언어에 대한 고민과 토론, 제안이 내부 정보에 그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도제식 교육으로 이어온 방송 언어의 외연을 넓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뜻 이룰 방법을 찾으니 길이 보였다. <우리말나들이>가 그것이다. 혼자서 원고 쓰고 편집하고 찍어낸 <우리말나들이>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몇 년 뒤, TV 프로그램 <우리말나들이>를 만들었다. 지상파 텔레비전 ‘최초의 아나듀서(Ana-ducer)’란 얘기를 들었다. 프로그램을 직접 기획하고 제작·연출한 첫 아나운서란 뜻이다. ‘방송 언어, 우리말 교육 프로그램은 실무 전문가인 아나운서가 연출해야 한다’는 신념은 내게 ‘최초’라는 이름표를 붙여주었다.
“걸어 다니는 표준어가 되겠습니다.” 1987년 가을, 신입 아나운서 여럿의 인터뷰 기사 가운데 튀는 제목이 달렸다. 프로그램 진행 욕심을 내세우기는커녕 특이한(?) 포부를 드러낸 아나운서가 누구인지 굳이 밝히지 않아도 아실 터. 파릇한 청년 시절 내세운 뜻은 반백이 된 지금도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초심’이 변하지 않아야 새로운 ‘만남’이 다가올 것이라는 설렘을 여전히 안고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