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목소리는 누군가의 마음에 닿는 길이다.

 

좁디좁은 길 위에 흩뿌려진 인간의 목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악기가 된다.

2009년 프랑스 문화예술 공로훈장인 슈발리에 훈장을 수훈하고, 2013년에는 파리 샤틀레 극장에서 단독 공연을 열어 전석 매진은 물론 15분간 관객의 기립박수를 이끌어낸 재즈보컬리스트 나윤선(46)은 자신만의 독특한 빛깔을 머금은 재즈의 꽃이 되었다.

 

 평범한 회사원에서 뮤지컬 배우로, 다시 음악에 대한 물음표를 이정표 삼아 26살에 떠난 파리로의 여정은 20년의 시간을 증명하듯 선명한 느낌표로 피어났다. 인생의 음표가 된 그 느낌표를 배열하기 위해 압구정의 한 카페에서 그녀를 만나보았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전해지는 인품에는 재즈에 대한 겸손함과 열정이 공존하고 있었다. 따뜻한 감성으로 뜨겁게 현재(Present)를 연주해온 그녀의 목소리가 선물(Present)인 이유이다.

 
 “재즈는 젊은 음악이에요.

어쿠스틱한 악기, 자연에 가까운 소리와 즉흥성이 매력이죠. 다른 장르들은 나이의 간극을 좁히기 힘든 게 많잖아요. 그런데 재즈에서는 80대 색소폰 연주자가 20대 뮤지션과 한 무대에 서는 게 자연스러워요. 마치 서로 대화를 나누듯이 말이죠. 건물이나 사람들은 세월에 따라 겉모습이 변하지만 문화나 예술 그리고 음악, 특히 재즈는 늙지 않는 것 같아요. 매번 무대에 설 때마다 새롭거든요. 현재진행형의 음악인 거죠.”

 규정지을 수 없는 무정형의 재즈처럼 그녀의 음악 인생도 경계 허물기의 연속이었다.

 

 속도 보다는 방향을, 표피적 꿈보다는 본질적인 질문들에 차근차근 대답해온 것이다.

 

 뭔가를 좇지 않았기에 역설적으로 그 뭔가를 이룰 수 있었다.

길 한가운데 서서 갓길로 몸을 기울이지도, 찍힌 발자국들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꿈은 하나의 좌표일 뿐 좌초가 아니기 때문이다.

 “얼마 동안 공부할지, 그 다음에는 어떻게 뭐가 될지 궁금하지 않았어요. 그저 노래를 위해 유학을 온 거예요. 4개의 학교를 동시에 다니고 개인 레슨까지 받으면서 정말 정신없었어요. 그렇게 10년이 되니 ‘이 길이 내 길일 수도 있겠다’ 싶었죠.

고맙게도 편견을 느끼진 않았고, 오히려 기회를 줬어요. 아무래도 재즈신에는 동양인이 거의 없어서 특별히 바라본 것 같아요. ‘다르다, 이상하다’가 아닌 ‘특이하다’의 시선으로 제 목소리를 받아줬죠. 그래서 누군가를 흉내 내는 것보다 저만의 장점을 살리려고 했어요.”

 특이함을 넘어 ‘특별함’으로 한 뼘씩 성장해온 그녀는 2013년, 세계적인 권위의 몽트뢰 재즈보컬 컴피티션(Shure Montreux Jazz Voice Competition)의 심사위원장으로 위촉됐고, 제18대 대통령 취임식 축하 공연 및 국립극장 최초 단독 재즈 공연의 쾌거를 이뤘다.

 이듬해 소치동계올림픽 폐막 공연에서는 조수미, 이승철과 함께 ‘아리랑’을 열창하여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빛나는 음표로 박혔다. 올해에는 국내에 머물면서 국립극장이 주최하는 ‘여우락 페스티벌’의 예술감독으로서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다.

 “1년에 260회 이상 공연을 했었는데, 앞으로 100회 정도로 줄이려고요. 그리고 올해 1년간은 작정하고 해외 일정을 잡지 않았어요. 영감을 얻고 국악 공부를 하기 위해서예요. 음악을 만들고 싶어도 한 자리에 있어야 가능하잖아요. 사실 처음에는 예술감독 제안을 거절했었어요. 그런데 직접 국립극장장님(안호상)께 자초지종을 전하던 중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해봐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받고 설득 당했어요(웃음). 오랜 역사의 재즈와 국악에는 서로 관련성이 많고, 마침 국악 공부를 하려고 했으니 운명인 거죠. 무엇보다 국악계의 젊은 뮤지션들이 월드뮤직신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다리 역할을 하려고 해요. 단순히 국악과 양악의 만남이 아닌 실험의 장을 마련하는 거예요. 중요한 건 음악이거든요. 남들보다 조금 더 경험하면서 얻은 정보들을 공유하고 싶어요. 저는 여기까지 20년 걸렸는데, 꼭 10년으로 단축한다는 게 아니라 20년이 걸리더라도 저보다 하나 더 갖고 출발한다면 더 풍성해질 수 있잖아요. 음악은 원래 오래 걸리고, 직접 말이 아닌 몸으로 부딪쳐야 하니까요.”

 그녀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을 관객들에게 읊조린 순간순간들은 곧 재즈의 진실한 언어가 되었다. 여기에는 ‘세계 최고’ ‘성공’과 같은 가치들이 개입될 틈이 없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서 잠시 비켜서서 음악에 대한 책임감을 되돌려 주려는 정직한 시간만 흐를 뿐이다.

 “음악은 스포츠와 달리 ‘세계 최고’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아요.

모두에게 인정받는 에디트 피아프와 같은 유니크한 분들이 너무 많잖아요.

 성공도 주관적인 거죠. 제 아이돌은 80살의 뮤지션인데, 그래서 희망이 있어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이브라힘(Ibrahim Ferrer)은 지긋한 나이에 ‘난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하죠.

 그게 성공한 인생 같아요.

일등이 없어서 힘들지만 나를 움직이는 힘으로 평생 갈 수 있으니까.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고 주어진 시간을 잘 컨트롤 해야죠.

 최고 보다는 최선으로.”

 낯선 땅에 살뜰히 뿌리내린 그녀는 재즈를, 재즈는 그녀를 자유롭게 만들었다. 연주여행으로 다양한 사람, 다양한 음악을 만났고, 음악의 외연과 내연은 점점 자리를 넓혀갔다.

 

 “내 말이 무조건 옳다”는 폐쇄된 확실성은 “이런 것도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예술적 완결성으로 옮겨졌다.

“음악은 스스로를, 그리고 누군가를 치유할 수 있어서 기적인 것 같아요. 얼마 전 메일 한 통이 왔는데, 시한부 인생을 살다간 한 청년의 누나가 보낸 거였죠. 프랑스의 한 지방에 살던 20살의 그 친구는 병 진단 후 2달 정도 살았는데, 그동안 제 앨범 에 수록된 ‘Lament’를 하루도 빠짐없이 들으며 힘을 얻었대요. 매일 일기를 쓰듯 동영상을 찍었고, 그것들을 차마 버릴 수 없어서 개인적인 다큐멘터리로 만들려고 하는데, 제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써도 되겠냐고 했죠. 그 친구를 직접 만나지 못해서 안타깝지만 제 노래가 위안이 됐다고 하니 가슴이 벅차더라고요. 직접 몸에 영양을 주는 물질도 아닌데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게 기적이잖아요.

 그만큼 책임감을 갖게 됐죠.”

 그녀는 자신이 이뤄낸 일련의 음악적 성취들에 시종일관 겸손했고, 그 공을 오히려 정신적 유산을 물려주신 부모님*께 돌렸다.

 어릴 때부터 공부든 음악이든 단 한 번도 강요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할 자유를 주셨기 때문이란다.

 “제 롤 모델은 부모님이에요. 처음 재즈를 한다고 했을 때 아버지께서는 1969년도에 발간된 재즈책 한 권을 주셨어요. 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새벽 3시 전에는 주무신 적이 없을 정도로 늘 열심히 공부하셨죠. 아직도 저는 어머니께 보컬 레슨을 받고 있는데, 노래를 정말로 잘하세요. 앞으로도 두 분께 늘 배우면서 닮아가고 싶어요.”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누군지 알 수 있는 가수가 되기 위해 오늘도 재즈 위를 미음완보(微吟緩步)하고 있는 그녀. 끊어질 듯 이어지는 목소리, 그 긴장된 호흡에는 음과 음의 치열한 생이 녹아있다.

 

 생멸을 거듭하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글. 김신영 기자
사진. 나승열

*아버지 나영수씨는 국립합창단 초대단장이자 한양대 명예교수, 어머니 김미정씨는 1세대 뮤지컬 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