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모델 활동을 할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엽서를 부치러 퐁피두센터에 갔다. 공중전화 옆 의자에 앉아서 주소를 적고 있는데, 억양으로 봐서는 미국 여자로 보이는 사람이 공중전화로 친구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국제전화니 빨리 이야기할게”

하며 시작한 통화는 점점 여자의 격앙되고 떨리는 목소리로 변하더니 결국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다. 통화 내용은 이랬다.

 “파리, 너무 좋아. 도시, 거리, 풍경 전부 다 정말 너무 예뻐.

 단지 파리가 너무 예뻐서 순간순간 이곳에서 이 아름다움을 나 홀로 맞닥뜨리고 견뎌내야 하는 게 너무 서글퍼.”

 그때 나는 그 여자의 손을 덥석 잡아주며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네요” 

하며 함께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마치 고양이처럼 도도한 파리는 결코 이방인들을 두 팔 벌려 환영해 주는 일이 없다.

그날 아침만 해도 그렇다.

아침부터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날씨도 따뜻한가 싶더니, 불과 2시간 만에 돌풍이 불고 소나기가 쏟아졌다. ‘이게 뭐람…’ 하며 비를 피하기 위해 샌드위치 가게에 들어가 파니니 하나를 사들고 나왔다. 문득 ‘오늘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에 가기로 한 계획을 취소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파니니를 한입 베어 물며 하늘을 다시 바라보니 해가 눈부시게 쨍쨍한 게 아닌가. 말간 하늘에서는 계속해서 보슬비가 내렸는데, 마치 파리 시내의 물살이 아주 고운 분수를 켜놓은 것처럼 황홀했다.

 비가 어느 정도 그치고 나서 변덕스러운 날씨에 취해 몽롱한 기분으로 원래 계획한 대로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로 향했다. 파리 동북쪽에 위치한 그곳에는 쇼팽, 들라크루아, 발자크 등 수많은 저명인사들이 잠들어 있었고, 그중에서 나는 대문호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의 무덤을 보고 싶었다.

그의 무덤 묘비에 찍힌, ‘낭만으로 가득 찬 붉은 입술 자국들’ 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는 신념으로 모국인 영국에서 추방되어 결국 여기 파리에 묻히게 되었는데, 낭만을 믿고 사랑을 믿는 많은 이들은 끊임없이 그의 무덤을 찾고 있다.

 그곳에 도착한 후, 나는 ‘공동묘지가 기껏해야 얼마나 크겠어’ 라는 생각으로 지도도 없이 슬슬 산책하듯 두리번거리며 오스카 와일드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걷고 또 걸어도 울퉁불퉁한 돌길은 오리무중에 빠지게 했고, 표지판은커녕 가도 가도 묘비와 적막한 무덤, 그리고 까마귀의 까악까악 소리밖에 없었다.

 인적 드문 거대한 묘지를 이리저리 걷고 있자니 아무리 대낮이라도 순간순간 섬뜩해졌다.

 나의 ‘감’으로 그의 무덤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점차 사그라지면서 지친 다리를 쉬기 위해 일단 가까이 있는 벤치를 찾아 앉았다. 그러던 중 등 굽은 백발의 할아버지가 튤립 한 다발을 들고 아주 느린 속도로 한 무덤을 향하고 있었다. 한참을 보고 있어야 아주 조금씩 달팽이처럼 종종 걸음을 옮길 정도로 느린 걸음이었다. 언뜻 보면 제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그는 오늘 하루 전체를 무덤 방문에 쓸 요량으로 보였는데, 말끔하게 빗은 머리와 단정한 옷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시절 무척 감수성이 예민했던 나는

 ‘아, 저것이 바로 Endless Love’ 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뭉클해진 가슴에 갑자기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며 눈물이 날까말까 하던 찰나였다.

 남의 무덤 앞에서 흑발의 동양 여자가 훌쩍이고 있는 모습이 섬뜩하고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 하여 얼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런데, 벤치에서 일어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약 10미터쯤이었을까?).

바로, 드디어, 마침! 오스카 와일드의 무덤을 발견한 것이다. 못 찾을 거라 단념하고 거의 포기하려던 참이라 더욱 기쁘고 반가웠다.

 
 역시 붉은 립스틱 자국은 여전히 많이 찍혀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경기침체의 한파가 사람들의 낭만도 싹 쓸어 갔는지, 사진 속과는 달리 꽃다발과 화분은 그리 많이 보이지 않았다. 말라비틀어진 장미가 놓인 묘비에 뭐라도 하나 놓고 싶었지만 가진 거라고는 껌 한통밖에 없어서 안타까웠다. 그걸 놓고 오자니, 무슨 시비 거는 것 같기도 해서 그냥 물끄러미 한참을 쳐다보다가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오스카 와일드를 만나고 난 다음 다시 공동묘지 입구를 찾아 나오는 길은 마치 꽃동산에서의 산책처럼 둥실둥실 걷는 기분이었다.

 나는 파리에 갈 때마다 황홀한 표정으로 늘 처음인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매번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다.

 문득 영화 <사랑해 파리 Paris, Je T ’Aime>(2006)의 한 에피소드가 스쳐지나갔다.

로맨틱할 일이 전혀 없을 것 같은 중년의 한 여성이 홀로 파리에 와서 홀로 밥을 먹고, 쇼핑하고, 산책하고, 관광하고, 벤치에 앉아 있다가 형용할 수 없는, 생전 느껴보지 못한 가슴 벅찬 기분을 느끼게 된다.

 그때 그녀는 자신이 이 도시와 사랑에 빠졌다는 걸 깨닫는데, 그 장면에서 나 역시 무척 공감했다.

 먼저 다가가면 할퀼 것처럼 날카로워지는, 차갑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인 모습으로 유혹하는 파리.

 

 비온 뒤 축축하게 젖은 길바닥이, 앙칼진 날씨가, 심통 맞은 모든 정경들이 파리와의 만남을 역설적으로 잊지 못하게 만든다.

 

 고양이처럼 도도한 그대 파리.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1983년 대구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2005 한중 슈퍼모델 선발대회로 데뷔. 제6회 아시아모델상시상식 패션모델상 수상(2011). 맥(MAC), 패션쇼 샤넬, 구찌, 페라가모, 에르메스, 비비안웨스트우드, 삼성전자 CF 등 모델로 활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