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 때, 함씨 성을 가진 친구가 반장이었는데 덕분에 별명도 함박스테이크였다. 한번은 번갈아 교단에 올라가 소원을 말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반장의 순서가 되자 올해가 가기 전에 함박스테이크를 꼭 먹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시절의 반장이라면 어느 정도 사는 집의 장남인데다 별명도 함박스테이크인데, 그걸 먹어보지 못했을 줄이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먹어본 것도 아니었다.
비로소 함박스테이크를 먹어본 건 초등학교 졸업식이 끝난 뒤였다. 아버지가 졸업 기념으로 시청 옆 경양식집에서 함박스테이크를 사주셨다. 나비넥타이의 웨이터까지는 아니더라도 포크와 나이프를 세팅한다거나 “라이스냐, 빵이냐?”라고 묻는다거나 수프가 나오는 일 등이 모두 신기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맛은 좀 실망스러웠다. 제과점집 막내아들로서 그건 빵 따로 나오는 햄버거에 가까웠다. 대신에 나는 이런 게 졸업인가, 혹은 이렇게 나는 조금씩 자라 어른이 되는 것인가 등과 같은 감회를 느꼈다. 이제 더 이상 초등학생이 아니듯, 나는 더 이상 함박스테이크를 먹어보지 못한 사람도 아니게 됐으니까. 그러자 아쉽기도 하고 홀가분하기도 한 마음이 생겼다. 함씨는 함박스테이크, 민씨는 민들레, 고작 그런 별명밖에 짓지 못하던 순수한 시절도, 자기도 못 먹어봤으면서 별명이 함박스테이크인데 함박스테이크를 못 먹어봤다고 놀리던 나도 그렇게 과거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가 함박스테이크를 먹지 못한 건 돈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 정도 돈은 모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우리가 사 먹을 수 있는 음식 리스트에는 함박스테이크가 없었다는 점이다. 반면 아버지에게는 그 음식이 점심으로 먹을 수 있는 여러 음식들 중 하나였다. 비록 졸업식 같은 특별한 경우에만 아들에게 사줄 수 있긴 했지만, 어쨌든 그걸 먹느냐 안 먹느냐는 아버지의 자유였다. 우리에게는 아직 그런 자유가 없었다.
청소년 시절, 하루라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그 자유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대학생이 된 뒤부터 이따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절망감 같은 게 들 때면 1983년 2월, 아버지와 먹던 함박스테이크를 떠올리곤 했다. 내 상상 속에서 함박스테이크는 함박(죄송!) 웃으며 말한다. “지금 네가 가진 돈이 얼마인지 확인해 봐. 그리고 그 돈으로 사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얼마나 많은지 상상해 봐.”
당장의 한 끼만 생각한다면, 아주 가난했던 학생 시절에조차도 나는 세상의 거의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랄 수 있었다. 제아무리 비싼 호텔 음식이라도, 먹지 못할 일은 없었다. 그러니까 한 끼에만, 현재에만 집중한다면. 그렇다면 지금 하나의 일을 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 역시 무한하게 많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얼마 전, 봄이 오는 신학기의 캠퍼스를 걸어갈 일이 있었다. 우체국을 지나 학생회관 건물 앞을 지나다 보니 구내서점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는 낯선 동네에서 서점을 발견하면 꼭 들어가서 서가를 훑어봤다. 우연한 방문이니 책을 많이 살 수는 없고 한 권만 골라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책 한 권을 사면, 대개 집에 가기 전까지 다 읽어버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수천 권 중에서 고른 한 권이라면, 내가 그토록 읽고 싶어 하던 책일 게 분명했으니까.
옛날처럼 책을 꼭 한 권만 사기 위해 그 서점에 들어갔다. 대부분의 책들이 교재였지만, 한쪽 벽에 신간서적들이 꽂혀 있었다.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 방향으로 한 권 한 권 책을 살펴봤다. 한 3천 권 정도 꽂혀 있었을까? 책을 고르는 데만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 젊은 소설가 백수린의 <폴링 인 폴>과 스티븐 킹의 <조이월드>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으로 결정했다.
책을 고르며 가격표를 확인하니 5만 원만 있으면, 나는 거기 서가에 꽂힌 모든 책을 살 수 있었다. 한 번에 모든 책을 살 수는 없겠지만, 그 순간 나는 어떤 책이라도 살 수 있었다. 가능성이 지금 나를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으로 만든다. ‘발등에 떨어진 불’이라면 허둥지둥 당황하는 모습이 떠오르겠지만, ‘점심에는 함박스테이크’라면 내겐 최고의 식사를 뜻한다. 마찬가지로 ‘오늘 밤에는 OO를 읽자’라는 문장을 채워보시라. 그 순간, 세상 모든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그런 사람이 되느냐 마느냐는 자신에게 달린 문제다.
사진/ 백다흠
문화/예술/공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