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기쁜 건 아직까지 제가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조금 슬픈 건 이제 스케이트를 못 탄다는 것, 선수로서.”

 

 이는 지난 소치동계올림픽에서 개막식 및 폐막식 기수로 나선 이규혁 선수(37)가 마지막 질주 후 밝힌 소회다.

만 4살 때 처음 스케이트를 탔고 30년 이상 차가운 얼음판 위에 뜨겁게 삶의 궤적을 남겨온 그는, 16세에 국가대표로 선발된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1994)을 시작으로 한국스포츠 사상 최초로 올림픽 6회 출전의 위업을 달성했다. 또한 1997년에는 1000m, 2001년에는 1500m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운데 이어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에서는 4번(2007, 2008, 2010, 2011)이나 정상에 오르며 ‘살아있는 전설’로 남아있다. 23년간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0.01초 안에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영광과 좌절의 언어들을 새겨온 그를 은퇴식(4월 7일) 다음날 만나보았다. 길고도 무거운 시간의 짐을 내려놓고 편안한 옷차림, 편안한 얼굴로 맞이한 그는 ‘끝이자 시작’인 은퇴에 대한 소감으로 인터뷰의 첫 번째 트랙을 돌기 시작했다.

 “어제는 너무 긴장되고 정신이 없어서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요(웃음). 올림픽 노메달리스트인데 은퇴식도 하고, 예상보다 은퇴식 규모도 커졌고…. 많은 분들의 격려와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어요. 새삼 운동을 허투루 하진 않았구나 싶어 뿌듯했고 감사했죠. 사실 3·4월은 선수들에겐 휴식기이기도 하고, 23년 간 대표생활을 해온 만큼 실감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아직 정리할 일들과 생각들도 많고요. 선수로서 오랫동안 버텨오며 이번에 은퇴한 것이 가장 잘한 일 같아요(웃음).”
회고록을 써내려가듯 시종일관 겸허한 자세로 감사함을 되뇌던 그는 자신의 모든 역량과 노력을 쏟아낸 소치올림픽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거라고 했다. 1분 10초 049, 그의 날카로운 스케이트날이 얼음 사이의 마찰력을 이겨낸 마지막 기록. 기록경기이기에 숫자 자체의 의미가 중요하겠지만 마지막 질주가 전해준 울림은 기록은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고 읊조리는 듯했다. 온몸으로 한계를 느끼면서도 그것에 도전한 서른일곱의 노장 선수가 흘려온 땀과 눈물은 삶처럼 견고한 얼음판 위에 얼마나 많이, 또 깊이 결빙되어 있을까.

 “아, 이렇게 올림픽이 끝나는구나 싶으면서도 기쁘고 홀가분했어요. 빙질의 느낌도 너무 좋아서 좋은 기억으로 끝맺을 수 있었죠. 벤쿠버때는 피눈물 흘리던 나를 숨기기 위한 억지웃음이었다면, 이번에는 만족감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웃음이었어요. 유일하게 웃을 수 있는 올림픽이었죠. 사실 올림픽을 위해 스케이트를 탔다는 말은 핑계였어요. 올림픽만 바라봤다면 아마도 불가능했겠죠. 스케이트를 타는 것 자체가 행복이고 삶이었으니까요. 올림픽을 떠나서 선수로서 더 오랫동안 스케이트를 타고 싶었던 거예요.”
백조는 물 위에 우아하게 떠있지만 물속에서는 쉴 새 없이 발길질을 하고 있다는 말처럼, 어쩌면 우리는 화면에 비친 그의 괜찮아 보이는 웃음과 도전 뒤에 한없이 웅크리고 있던 울음과 좌절을 편집된 기억과 감동으로 간과해온 것은 아닐까, 문득 조심스러워졌다.

“음, 저도 메달의 꿈이 좌절되면 텅 빈 숙소에서 몇 시간이고 울곤 하죠(웃음). 올림픽 전보다 후가 심리적으로 훨씬 흔들리고 쓸쓸함과 외로움도 더 하거든요. 올림픽 전에는 메달 따는 상상만 하잖아요. 아마도 세계신기록을 보유하고 나간 98년 올림픽 때 가장 크게 좌절했을 거예요. 기대주로 나갔다가 실패하면 출전한지도 모르게 사라지거든요. 그런데 오히려 그 일을 계기로 재능이 아닌 노력에 비중을 둔 열정적인 선수가 돼야겠다고 다짐했죠.”

 

올림픽 메달을 위해 4년, 겸손하게 버티며 4년, 훈련 강도를 높이고 양을 늘리며 4년, 명예로운 은퇴를 위해 또 4년…. 올림픽을 고대하며 스케이트에 생(生)의 의지를 싣고 달려온 그에게 있어서 올림픽 메달은 전부이자 전부가 아닌, ‘과정’의 다른 얼굴이었다.

“어릴 때부터 주목받아서인지 자부심은 곧 자만심으로 바뀌어 갔어요. 가진 것에 비해 겸손함이 부족했던 거죠. 20대 때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알고 있다고 착각했고요(웃음). 정말 다행인 건, 올림픽 메달이 없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 소중함을 알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그리고 언젠가부터 ‘내가 꼭 메달을 못 따더라도 누군가를 따게 해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죠. 스케이트를 가르쳐주신 모든 선생님들이 저의 멘토였고, 모든 쓴소리가 저를 일으켜 세웠다는 것도 뒤늦게야 깨달았어요.”

 

그는 타고난 재능 덕에 남보다 더 빨리 좋은 위치에 올랐지만, 그 재능만을 믿은 탓에 무엇이 왜 좋은지도 모른 채 시간에 떠밀려왔다고 한다. 선수다운 선수가 되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며 호탕하게 웃는 그에게서 자신을 인정하고 증명하기 위해 찰나를 불태우며 지난한 시간과 대면한 고군분투가 느껴졌다. 유독 메달과는 인연이 없었던 올림픽을 통해 삶의 부침(浮沈)을, 스스로 부족한 선수임을 깨닫고 그것을 성장 동력으로 삼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앞으로 선수로서 부족했던 부분을 채우며 살겠다는 그는 결핍의 자리에 성장을 위한 공간을 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경쟁만 해서 심적으로 힘들었기 때문에 앞으로는 누구를 이기기 위해 살진 않을 거예요. 그래서인지 요즘 제 얼굴이 많이 편해졌다고들 하더라고요(웃음). 이벤트성이라도 스케이트 교실에서 아이들과 경쟁 없는 스케이트를 타보고 싶어요. 그리고 선수로서 풀리지 않은 부분들을 이론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현재 박사과정을 목표로 석사과정 논문을 준비하고 있어요. 물론 이것을 어떻게, 어떤 포지션에 쓰느냐가 중요하겠죠. 당장 뭔가를 정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스케이트와 관련된 일을 할 거예요.”

‘무관의 제왕’‘노메달의 영웅’, 그에 대한 수식어는 올림픽 메달과는 다른 결의 감동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는 그저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이규혁’으로 기억되면 그만이라고 했다.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도(Godot)’가 존재하거나 그렇지 않은 대상을 상징하며 기다림을 역설했듯, 그의 기다림은 올림픽 정신으로 피어난 얼음꽃이 되었다. 그는 선수로서의 영광과 좌절을 얼음판에 묻어두고 다시, 출발선에 서서 내일을 향한 총소리에 몸을 맡긴다. 몸의 반응을 믿으며 출발선에 섰던 지난날처럼 인생의 제4막을, 그 위에서 펼쳐질 새로운 서사를 기다리며.


글/사진. 김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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