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14년차.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아직도 떨려요?”이다.
내 방송의 시작은 이랬다. 2004년도, 입사 3개월 차 새내기 때 처음으로 20여 분 새벽 뉴스를 진행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거의 유체이탈 상태, 흔한 말로 ‘멘붕’에 가까웠다. “마지막 문장”, “화면 체인지”와 같은 흔한 피디콜에도 깜짝 놀라 멘트를 멈추기도 하고, 멘트를 조금이라도 틀리면 금방이라도 울음 터질 듯한 표정이 돼버렸다. 심지어 “뉴스를 마칩니다” 클로징 멘트를 한 뒤에는 고개 숙여 인사하는 것도 잊고 계속 카메라를 응시했던 기억이 난다. 당황한 피디가 카메라를 계속 노려보는 나를 5초간 비추다 “야! 고개 숙여야지” 하며 황급히 광고로 넘겼다. 첫 방송부터 의도치 않게 시청자에게 인사도 안하는 ‘건방진 앵커’가 된 순간이었다.
그런 기상천외한 사고는 주로 신입이 주인공이다. 심장이 뛰다 못해 터질 듯하고 실수하면 선배한테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중압감 속에서 병아리 날갯짓을 하다 보면 갖가지 해프닝이 속출한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한껏 여유가 생긴 베테랑이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속보가 들어와도 표정관리 잘하고 카메라 프롬프터가 꺼져도 능구렁이처럼 넘어갈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시작의 떨림과 흥분이 익숙함으로 변해갈 쯤 반드시 다른 고비가 찾아오는 것 같다.

14년 차의 익숙함을 산산조각 내버린 ‘또 하나의 시작’이 있었다. 1년 여 전부터 새로 맡게 된 밤 10시 종합뉴스, <김선영의 뉴스나이트> 속 ‘공감토크’였다. 기존 뉴스와는 다른 차별화된 인터뷰 코너를 만들겠다는 포부로 스튜디오에 작은 공간을 꾸렸고 소파를 들여놨다. 꽃도 놓고 찻잔도 준비했다. 내가 오랜 시간 꿈꾸던 뉴스 속 따뜻한 인터뷰 코너를 최초로 시도한 것이다. 소파 디자인부터 책장 인테리어까지 밤새 고민했다. 어설프게나마 공간도 직접 꾸미고 출연자에 맞는 소품까지 고민했다. 뉴스보다 자연스럽지만 오락 프로그램처럼 가볍지 않게, 깊이 있지만 지루하지 않게, 온갖 미사여구로 목표를 설정하고 멋지게 시작해보고 싶었다.
첫 게스트는 고은 시인이었다. 시집을 사서 밤새 읽고 몇 시간 동안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많이 알면 더 좋은 질문을 할 수 있겠지, 성실한 준비가 탄탄한 인터뷰로 이어지겠지. 부푼 기대감에 인터뷰를 시작했다. 하지만 인터뷰는 순조롭지 않았다. 준비한 질문 리스트를 다 소화해야 한다는 내면의 조급함, 유난히 천천히 말씀하시는 시인의 화법, 시간의 제약을 재촉하는 피디의 다그침. 뉴스 같지 않은 편안함을 지향한다던 인터뷰는 종착역에 다가갈수록 편안하지 않은 시간이 되고 말았다.
각본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 속에서 내 얼굴엔 불안감이 깊어졌고 시인의 답변은 계속해서 나의 예상을 빗나갔고, 피디는 인내력을 잃어갔다. 마지막 3분. 나는 일종의 자포자기 심정으로 고은 시인께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시 한 구절을 낭독해 달라 부탁했다. 허공을 응시하던 백발의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 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고은, ‘노를 젓다가’

짧은 세 문장. 그 세 문장이 인터뷰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가 되었다. 그것이 바로 시대를 대표한 시인의 내공일까? 강펀치를 맞은 기분이었다. 시 구절처럼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야, 첫 시작이 완벽해야한다는 중압감을 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시인의 눈빛이 보였다. 시의 울림을 느껴졌다. 내가 아니라면 더 좋은 인터뷰가 나왔겠지? 자책감이 커져 한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오프라 윈프리는 좋은 인터뷰를 이렇게 표현했다. “상대방과 함께 손을 맞잡고 춤을 추는 거죠. 서로의 스텝을 보며 완곡 조절을 하는 거예요. 그래야 멋진 춤이 나오죠. 중간에 상대방이 춤을 추기 싫어진다거나 집중하지 못한다면, 그건 무조건 실패한 것입니다.” 상대방과 어우러지는 멋진 춤. 누가 더 돋보이기 위한 것도, 짜인 대본을 완성하는 것도 아니다. 시청자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해 진행자와 인터뷰이가 먼저 마음을 나눠야하는 것이다.
공감토크 코너는 몇 달 후 다른 코너로 대체되며 마침표를 찍었지만 새로운 시작과 마침표는 나에게 또 한 번의 성숙의 기회가 됐다. 그리고 간절한 꿈을 남겼다. 언젠가는 정말 멋진 춤을 추고 싶다는 꿈. 보는 이가 그 춤 속에 완전히 녹아들 수 있는, 영감을 전하는 멋진 춤 말이다. 누군가 나에게 “아직도 떨려요?” 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미래에 더 멋진 무대에서 누군가와 최고의 춤을 추고 있을 거예요. 그 생각을 하면 떨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