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동 구두 골목엔 오늘 새로운 바람이 분다
 
성수수제화타운에는 명장들이 있다.
50년 동안 구두만 만든 남자가 있다.
구두를 배우는 스무 살 청년도 있다.
아직도 그들은 손으로 구두를 만든다.

EDITOR 김도훈

나는 스니커즈 애호가다. 구두라곤 딱 두 켤레밖에 없다. 갈색 브로그는 파리의 벼룩시장에서 산 것이다. 30유로 정도를 주고 샀는데 신자마자 양말에 갈색 물이 들었다. 구두는 역시 좋은 것을 사야 한다는 걸 그때 배웠다. 또 한 켤레는 드리스 반 노튼의 검은색 구두다. 아무 장식도 없는 정갈한 구두처럼 보이지만 바닥이 파란색 고무로 되어 있다. 드리스 반 노튼의 구두를 산 이유는 장례식 때문이었다. 나이가 드니 장례식에 가는 일이 점점 늘어났다. 하얀색 스니커즈도 괜찮긴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조금 더 격식을 차리고 싶었다.

나는 구두가 싫었다. 불편하게 발을 옥죄는 느낌도 싫었고, 끊임없이 관리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싫었고, 무엇보다도 나이 든 남자는 구두 하나쯤 있어야 한다는 어른의 법칙이 싫었다. 그래도 구두를 사야 했다. 지루한 어른의 구두는 싫었다. 그나마 바닥이 파란 고무로 된 구두라면 적절한 타협안이 될 것도 같았다. 고모의 장례식에서 만난 아버지가 호통을 쳤다.

“너는 구두가 그게 뭐꼬. 남자는 신사화를 신어야지 신사화를!”

신사화? 백화점 2층 매장에서 양복을 차려입고 머리에 왁스를 과하게 바른 남자들이 깍두기처럼 인사를 하며

“형님 구두 찾으십니까?”

라고 말하며 내미는 그 신사화? 그래도 아버지의 호통에 일리는 있었다. 어쨌든 파란 고무창 따위 없이 격식에 맞는 구두 한 켤레쯤은 필요하게 마련이다. 문제가 생겼다. 구두를 사기로 마음먹었지만 통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점잖은 플레인 토 구두는 눈에 차지도 않았다. 스터드가 과도하게 박힌 프라다의 윙 팁 구두나, 바닥이 비브람 솔로 된 그렌슨의 브로그 정도가 눈에 들어왔다. 침을 질질 흘리며 인터넷 창에 값비싼 구두들을 띄워놓고 구경하는데 후배가 지나가며 말했다.

 

“그 브랜드는 신으면 의외로 되게 불편하다던데….”

맞다. 구두는 스니커즈와는 다르다. 대충 맞는 사이즈를 신고 신발 끈을 매면 금세 편해지는 스니커즈와 달리 구두는 자기 발에 딱 맞는 사이즈를 구입해야 오래 신을 수 있다. 발볼의 너비에 따라 알파벳 표기(AA, A, B, C, D)가 붙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내 발볼의 크기? 모른다. 구두를 별로 신어본 적도 없는데 발볼 크기 따위 알 리가 없지.

피렌체에 가서 이태리제 수제화라도 맞춰 신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성수동에 수제화타운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자, 그 순간에 내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한번 상상해보시라. 피렌체처럼 좁은 성수동 골목길에 수십 개의 공방이 있다. 100년간 수제화만 만들었을 것 같은 포스의 영감님들이 가게 앞에서 망치질을 하고 있다. 영감님들 옆에는 금발의 이탈리아 소년이 열심히 구두 만드는 법을 메모 중이다. 볼사리노를 쓰고 하얀 수트를 입은 영감이 가게에 들어선다.
 
“본 조르노. 로베르토 자네는 아직도 구두를 만들고 있나. 아들한테 물려주고 소렌토에서 휴양이나 할 나이에.”

“쏘팔메토 이 능구렁이 같은 영감. 지난번에 만들어간 구두는 왜 또 그 모양으로 만든 건가.”

“그래서 내가 로베르토 자네를 찾아왔잖아. 내 신발은 자네가 평생 만들었으니 수리도 자네가 해야 하네. 껄껄껄.”

한창 망상을 즐기던 와중에 지하철은 성수역에 도착했다. 성수수제화타운은 성수역 1번 출구에서 시작해 건너편 영동테크노빌딩까지 이어지는 작은 구역에 자리 잡고 있다. 모두 10여 개가 채 안 되는 매장이 있는데, 각 매장에 들어가면 ‘성동구 인증 성동제화협회 공동 매장’이라는 문구가 자랑스레 붙어 있다. 11월에는 서울시와 성동구가 예산을 투자해 성수역 건물 외부에 꽤 번듯한 매장들을 새로 만들었다. 성수동 수제화의 꿈을 표현했다는 조형물 ‘고양이의 빨간 꿈’도 있다. 조형물은 아직 비닐로 꽁꽁 묶인 상태다. 수제화와 고양이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 걸까. 내가 키우는 고양이는 집에 놀러 온 사람들의 신발에 코를 처박고 냄새를 맡는 이상한 성격을 갖고 있다. 냄새에 도취되면 신발에 온몸을 비비며 울기도 한다. 성수수제화타운 관계자들이 나 몰래 우리 집에라도 놀러 왔던 걸까. 고양이와 수제화의 다소 음탕한 관계를 상상하며 매장으로 들어섰다. 비가 오는 날이라 손님이 많진 않다만, 10대 후반의 남자와 엄마가 한창 구두를 고르는 중이다. 졸업식, 혹은 대학 입학식에서 신을 구두를 고르러 온 걸까. 표정이 그리 밝진 않은 걸로 미루어 보아 이 친구는 백화점 2층 매장으로 갔다가 “이거 절반 가격에 더 좋은 거 살 수 있다”는 엄마 손에 이끌려 이곳으로 왔겠지. 굳이 다가가서 물었다.
 
“왜 여기 구두를 사러 오셨어요?”

학생은 말이 없다. 엄마가 곁눈질로 슬쩍 보더니

“구두도 좋고, 싸니까…”

라고 얼버무린다. 사실이다. 성수수제화타운의 수제화들은 저렴하다. 그러나 저렴한 것 말고 또 어떤 메리트가 이 ‘타운’에 있는 걸까. (중략.....)